모든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쉬운 만화
하나의 우주인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그 우주는 모두 다르기에 지구에는 60억 개가 넘는 찬란한 우주가 존재한다.
그 우주는 너무도 달라,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느낌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깊이 또한 다르다.
많은 우주들이 '며느라기'를 읽고, 표면적인 상황만이 아닌 이면의 상황도 눈치채길 바란다. 내가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빠를 봤듯이.
웹툰 '며느라기'의 인기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돌아다니는 몇 컷을 본 기억이 있고 참 표현을 잘했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책을 살 일이 있었는데 이 웹툰이 책으로 나왔다길래 돌려보기 좋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미니멀라이프 인간은 책도 함부로 사지 않는 법!
며느리의 괴로움은 주체성 있는 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시작된다.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애써 지울 것을 '부드럽게' 강요당하는 것, 그래서 거절의 순간조차 애매한 상황들은 주인공이자 며느리인 '민사린'을 힘들게 한다. 아무렇지 않게 며느리를 하대하는 시어머니. 남은 찬 밥은 나와 네가 먹자고 하는 시어머니.
나는 이 시어머니가 참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만화 중반부를 넘어가다 보면 사실 시어머니 역시 구시대의 악습과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알 수 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부인이나 식구라기보다 집안의 종처럼 하대한다. 제사상을 차리는 중노동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자신의 형님이 제사상을 차린 아내에게 수고했다 말 하자 정작 남편은 '별것도 아닌 일'이라는 말로 부인의 노동을 손쉽게 평가절하함과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우습게 만든다. 힘든 노동으로 지친 시어머니가 다음 끼니는 외식 하자는 말에 면박을 주는 시아버지의 모습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행하는 소리 없는 폭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자신의 부인이나 가족에 대한 평가나 혹은 그들의 노동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는 것이 꼭 겸손의 표현인 것만 같은 명절의 모습. 그 장면을 지나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 작가 완전 대단하네. 단순한 장면을 이렇게 과장하거나 보태지도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구나. 그렇게 시어머니도 시대의 폭력 속에서 구제받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한 피해자임을 보여주는구나.
시어머니가 민사린에게 행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들이 의도된 악행이라기보다, 원래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줄 알고 자신도 살아왔던 삶이니까, 부당하고 이상하다 느꼈겠지만 며느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던 그녀의 입장을,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보며 불현듯 작년 추석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불화하고 있는 아빠가 생각났다.
머리 좀 굵은 자식이 되고 나서, 나는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빠의 가부장적인 행동들이나 폭력은 여전히 잘못되었고 많은 일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격하게 말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아빠의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싶다.) 그러나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 시대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나는 그저 아빠의 모든 문제 행동과 원인을 '아빠에게만' 돌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백한 나의 잘못이자 판단 오류였다. 이 만화를 보면서 아빠 역시 그렇게 살아오는 것이 당연했던, 부인과 가족을 깎아 내림으로써 그것이 겸손인 줄 알던, 말 그대로 시대에 편승해 살아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악이 악인 줄 모르는, 나쁜 문화가 나쁜 줄 몰랐던, 다 그렇게 사니 그게 맞는 줄 알았던, 그렇게 보고 배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삶에서 배움의 기회가 적음을 인정해야 했다. 모든 것들이 삶에서 체득된 생존 방식임을 이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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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늘도 두렵다. 나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범하겠지, 타인에게 악이 악인 줄 모르고 행하고 뱉으며,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그저 그 사람의 잘못된 인격에서 비롯됐을 것이라 오해하며, 모든 행동을 나의 가치관과 생각으로 필터링하여 수용함으로써 타인을 평가하겠지.
산다는 것과 그것을 채워가는 하루하루가 불편하고 두려워 어렵다. 내 손과 발과 입으로 인식도 못한체 또 무수히 많은 죄를 짓게 될까 봐.
오늘도 내 주변과 모든 만물들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사람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재밌는 웹툰이 단순히 한 때의 유행으로 흘러가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길 바란다.
Ps. 매일 점심을 먹는 카페 사장님께 이 책을 추천했더니 읽고 너무 화가 난다고 하셨다. 자신의 모습 같다며 발끈하셨다. 근데 다 이렇게 사니까..라는 마지막 말이 나를 더 서글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