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이자 고통, 책 쓰는 욕망남 강신주
그의 말투는 아프지 않다. 어떤 이들에겐 질타를 받는 반말도, 격한 단어 사용도 내겐 별 거부감이 없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말들이다. 그가 사색하고 내놓은 철학 속에서 나오는 말들. 그 말이 나의 진짜 약점을 건드릴 때 나는 아프다.
말 그대로 철학이기에, 저 깊은 곳을 사유한 후 스스로 내면화 한 사람의 말이기에 그 내용은 사람 마음의 저 깊은 내면, 말 그대로 속마음, 잊힌 줄 알았던 오래된 상처, 열등감 같은 것들을 복합적으로 두루두루 자극한다. 그러나 나 역시 만만치 않은 변태 같은 인간이라 고통에 직면할 힘을 기르고자 열심히 찾아 읽는다. 내 마음을 찌르면 무엇이 문제인가? 혼자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리고 찾아내는 것이다 내 마음의 없애버리고 싶은 찌꺼기 같은 모습들을. 의외의 면면에서 발견되는 열등감과 구김살들은 당연히 한 번에 완벽히 괜찮아지지 않는다. 우선 나 스스로 가면을 벗고 상황을 직면하는 것 만으로 한결 힘을 얻는다. 때론 절망할지라도.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의 강연이나 책, 어떤 매체에 나오는 모습도 피하게 된 내 모습이 그래서인 줄 알았다. 여러 권의 책이지만 실은 동일한 주제로 반복되는 텍스트들 속에서 그 무언가가 내 마음을 강력히 찌른 줄 알았다.
평소 상태에서 찔림을 당하면 그럭저럭 위의 과정처럼 생각과 생각의 꼬리를 물어나가는 과정을 감당하겠으나, 무상이나 죽음 따윈 생각해 본 적 없던 나는 스스로를 꾸준히, 무던히도 괴롭혀 왔던 덕분에 몸과 마음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말 그대로 고통을 직면할 힘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게임으로 치면 마나가 좀 떨어진 상태랄까. 그럴 때 찔린 상처라 좀 오래가는 줄 알았다.
실은 근 몇 년 동안,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슴도치가 되어 저 구석에 혼자 머무르면서 세상과 단절하는 삶의 방식을 택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절이라기보다 내 주위의 모든 것과 소리 없는 불화를 하고 있던 셈이었다. 하루에 열 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근처에 오지 마시오.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제발 그냥 날 놔두시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내 하루하루의 간절한 바람이자 소원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아무리 구석에 있고자 한들 굳이 그걸 찾아 내 괴롭히는 사람도 있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그 모습을 연민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다. 진정 홀로 있고 싶다면, 타인의 그 어떤 호기심도 자극하지 말지어다! 그러나 또 그것은 어디 내뜻대로 되는가.
그의 말처럼 인간은 이상하게 진화해 온 존재이고, 그것이 희망이자 그것이 절망이다. 내게 인간의 존재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며 이상하고, 또 말할 수 없이 복잡하게 존엄한 존재이다. 이런 이상한 느낌, 나도 알기 싫었다.
이전 글에도 썼듯, 얼마 전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람 사이의 갈등에 대한 스트레스 민감도가 높은 편이라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편인데, 못된 사람 한 명이 가면을 쓰고 몇 년에 걸쳐 만든 늪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애를 좀 먹었고 지금도 침묵으로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스트레스 한계치에 도달한 내면이 뻥 하고 폭발 해, 엄청난 사고를 한 번 겪게 됐다.
죽을 뻔한 사고에서,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죽음을 실감한 뒤 내가, 지금이, 오늘이, 이 상황이, 내 주변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모든 것이 무상함을 피부로 느끼고 난 뒤 나는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사건 이후 지인을 통해 강신주의 강연 소식을 듣게 된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일' 중 하나인 그의 강연에 가기로 결심했다. 먼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내면의 갈등이 문제였다. 오랫동안 피해왔던 그의 언어였다. 그러나 솔직해진 내면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다.
오랜만에 느껴본 진심으로 설레는 감정이었다.
강연이야 좋았고 마음에 와 닿았다. 강연회에서 필기를 딱히 하지 않는 편인데, 요즘의 말랑해진 마음 때문인지 마음에 닿은 말들을 다시 새기기 위해 종이도 없는 상황에서 가방속 책 뒷장에 열심히 필기까지 하며 들었다. 강연이 끝나고 운 좋게 잠깐 이야기를 할 틈도, 사진을 찍을 기회도 있었다. 자, 이제 나는 고백해야겠다. 나는 그의 생각과 가치를 좋아하는 것으로 입덕 했지만, 이제는 '강신주'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돼 버렸다.
젠장 맞게 지독하고 강렬한 짝사랑,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블랙홀에 이미 빨려 들어간 나 자신을 그 날, 그 순간에야 인지하게 됐다.
강연은 수요일이었는데, 주말에 있을 시험을 위해 책을 펴면 자꾸만 그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정에 직면함으로써 인식하게 된, 오랫동안 억눌려 온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조용히 손으로 써 보았다. 나는 강신주라는 사람을 오랫동안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사람, 내게는 신 포도 같은 존재라 일부러 그의 존재를 멀리 해 왔던 나의 방어기제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가 일면식도 없는 김수영의 시에서 인간상을 보고, 또 자신을 비춰 보며 결국엔 그를 아버지처럼 느끼며 사모하였듯 나 역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스승으로서 그의 모습은 물론, 그것을 뛰어 넘어 그를 사모한다.
그의 작품 중 잠들기 위해 일부러 집어 들곤 했던 어렵거나 재미없는 책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잠들게 하는 책이 되지 못한다. 그의 생각이었을 한 구절구절은 내게 새로운 의미로 바뀌었으므로 설레는 연서가 되어 읽힌다. 미치겠다.
집필 중이라는 그의 근황은 예전이라면 신작에 대한 기대로 다가왔겠지만, 이젠 그의 건강에 대한 걱정으로 치환된다.
이제 강신주라는 이름은 철학자가 아니라 내게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내 마음이지만,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없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으며, 후덥지근한 밤의 공기 속에서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체 조명등에 책을 비춰 보며 나는 또 그를 생각한다. 행복하고 괴롭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에서 늘 되뇌던 구절이 생각난다.
Free from suffering
짝사랑에 대한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더 열심히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소진되는지 더 자라날지 지켜볼 일이다. 사랑함으로써 나는 애틋하여 행복할 것이며, 간절하여 고통받을 것이다.
그 어떤 사랑도, 고통이 담기지 않은 사랑을 나는 보지 못했다.
감히 내 선택의 영역을 넘은 이 감정을 나는 그저 흘러가게 두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밖에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