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감정의 무거움

감정적인 인간의 독서 후에 오는 것들

by 떠돌이

5:30에 정시 퇴근하여 도서관에 가면 여섯 시가 좀 넘는다. 몇 권 (이라 쓰고 열다섯 권쯤)의 책을 가져와 차례대로 펼쳐보다 마음에 드는 몇 권을 고른다. 문화가 있는 날에는 10권, 평상시는 5권 대출이 가능하므로 볼 책, 빌려갈 책을 고른다. 그 자리에 앉아서 아홉 시 정도까지 책을 읽으면 어깨가 아파온다. 고른 책 중 다 못 본 것을 다시 빌려서 집에 오기 때문에 책을 고를 때 신중하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단 하나, '재미'이다. 흥미를 느껴 재미까지 도달해야만 그 책을 빌려온다. 평일의 독서를 순수하게 유희로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다 읽거나 지적(욕구가 아닌) 허영 때문에 끌리지 않는 것을 읽기에 시간은 너무 아깝고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을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으로서, 쓸데없이 낭비하며 향유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아껴 써야 할 시간도 필요한 법. 내게 책 보는 시간은 전자이다. 무조건 재미! 흥미! 정신적 쾌락과 감정의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라는 낱말을 쓰고 나니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3학년 올라갈 무렵의 학생회 선거 개표일이 생각난다. 그 날 경험한 독서의 카타르시스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총학생회 선거의 개표는 넓은 장소에 모여 (주로 본부가 있는 인문대 건물) 이미 당선된 단과대 후보들과 선본을 꾸렸던 많은 이들이 모여 개표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데 개표 작업이 오래 걸려 거의 밤을 새우고 새벽에 끝, 그러니까 결론이 난다. 사실 그 해 '동아리 연합회 부회장'으로 이미 당선된 나는 그 장소에 가지 않았는데 이유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각난다. 총학생회 선거는 그 해 오랜만에 경선이었는데 상대편 후보가 정말 인간 말종이었다. 그러나 그 후보&해당 선본의 당선이 유력했음은 물론 자본력까지 어마어마했다. 선거 과정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편'인 선배들과 선본이, 수세에 몰린 자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인지 선거 기간 내내 실망스러운 행동을 반복해 가며 아주 죽을 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기에, 나쁜 상대편이 싫지만 우리 편도 실망스러운, 뭐 그런 상태였으므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뭔가 심드렁했고 기분이 그저 그랬기에, 나는 추운 동아리방에 남아 책 한 권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재미있었고, 추위를 참고 언 손가락을 펴 가며 책장을 넘길 만큼 흡인력이 있었으며, 나중엔 참을 수 없는 내적 폭발을 일으킬 정도였던 책이라, 아직도 그 책을 가끔 선물하고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아무튼 그 당시 책을 다 읽고 나자 갑작스러운 내적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살면서 두 번째 느껴보는 것이었는데 처음보다 강력했으나 전혀 학습되지 않은, 그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행복으로 가득한 일종의 '매우 흥분' 상태였다. 깊은 감동을 넘어서 갑자기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넘쳐흐르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눈에 보일 것처럼 넘실거렸고 나는 그 파도를 타며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콧등이 시큰거리다 결국 뜨거워진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나중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음에도 감정이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으나 통곡이 지나가고 난 그 자리, 고요하고 아름다운 눈물이 흘렀다. 조용한 침묵 속에 고개를 들어 옆 벽면의 거울을 보니 늘 어두컴컴했던 동아리방 형광등의 조명과 어우러져 희미하게 웃는 표정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줄줄 흐르는, 기과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마치 뇌 전체가 도파민+아드레날린으로 샤워를 한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 길이 없었기에 개표가 끝나가던 새벽, 이 감동의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어둠을 뚫고 인문대로 전력 질주하여 선배들에게 사랑한다고, 세상은 아름운 곳이기에 나는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축복받은 이 생을 감사히 여기겠다고, 늘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이며 모든 이가 그러하도록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어떻게?), 세상은 그렇지 않아 보여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못해 흘러넘치며, 신은 어떤 형태로든 늘 존재하며 우리 곁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머물기에 우리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늘 겸손해야 하고............ 나는....(울먹울먹)...... 선배 저는........ 훌쩍.. 어쩌고 저쩌고........... 라며 독서의 감동을 (남들에겐 술주정 혹은 약발에 취한 신도의 간증 정도로 보일) 쏟아냈다.

아름다운 작품이 선물한 스탕달 신드롬에 흠뻑 취해,

하필 우리 편 선본의 패배로 분위기가 개판인 상황에서.


나는 그 날, 자신을 친히 찾아온 왕께서 허리를 숙여 필요한 것을 묻자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좀 비키라고 말하던, 성욕이 생기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자위 한 판 했다던 진정한 자유인 '디오게네스'의 현존이었다. '사회적 방어기제를 완전히 깬', 나의 감정을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 공기에 퍼뜨린 진정한 자유인.


그날 이후 난 승리한 상대 선본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아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 내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야 그.. XX 교 애들 진짜 독하더라.. 선거철 딱 맞춰서 일반 학우인 척 선본에 잠입해가지고.. 선거 날까지 기다렸다가 새벽 개표까지 다 보고, 그 선본 지니까 그 상황에서 이때다 싶어서 전도를 하더래. 위로하는 척 막 힘내라면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주님이 돌봐 주실 거라나, 세상엔 사랑이 충만하다느니 어쩌니 이상한 간증 같은 거 하면서. 와.. 완전 소름 돋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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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아는, 그러니까 그 날 내게 '간증'을 당한 이들의 표정 역시 생생한데, 나는 그 날 표정이 말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한 마디로 "아.. 쟤 또 뭐래.. 왜 지랄이야.."

였다.


아,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이 궁금해하실까 해서 책 제목을 남긴다. 나를 순식간에 광신도로 만들었던 그 책은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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