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으며 눈물 속을 헤엄친 시간에 대한 경험담
요즘 눈물이 너무 많아졌다. 심할 땐 무릎이 푹 꺾일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잘 빠진다.
얼마 전에는 평창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패럴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대식가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맥주와 거대한 안주 한상을 준비 해 놓고,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경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기 위해 티브이를 틀고, 곧 시작할 개막식 구경을 준비했다.
개막식은 내가 좋아하는 김연아도 나왔고 나름 볼만 했는데, 그런데 아니 그게 뭐라고 그렇게 슬프던지. 감격도 기쁨도 눈물로 표출되나 보다. 가랑잎 하나 또르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거리 거나 눈물짓는다는 감성 충만 사춘기 소녀처럼, 나이 서른이 넘어 갑자기 눈물이.. 많아졌다....(아련..)
영화의 예고편이나 다큐를 봐도 이 증상은 어김없이 발현되는데, 책도 마찬가지이다. (현재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도 그렇다. 표정 관리가 안되면서 인상 써지고 코가 시큰거림) 아무튼 어떤 매체든 나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눈물이 나는데 이게 정말 미칠 노릇이다. 어느 정도로 증세가 심각하냐면, 퇴근길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어제 읽었던 책 내용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는 거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정도 있는데, 바람은 불고, 머리카락 흩날리고 재킷도 살짝 펄럭이며 눈에 흐르는 눈물, 영화 주인공 된 줄 알았다.
이런 감수성 초 충만해진, 게다가 눈물에 관련된 감각 중추만 엄청 예민해진 나를 며칠 동안 저 깊은 우울의 우물로 빠뜨려 도저히 나올 수 없게 만든 책 한 권이 있다. 부은 눈 때문에 렌즈를 착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10시 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새벽 2시쯤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르고 눈물을 닦았다. 내가 곧 책 속의 모든 주인공이었으므로, 그들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었으므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비신부 '정요한' 이 느끼는 소희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소희의 열병 역시 내가 사랑에 아플 때,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도리가 없을 때 몸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당연히 몸이 아프게 되듯 서로에 대한 간절함과 뜨겁고 처연하도록 열렬한 사모의 마음, 완전하고 싶으나 그렇게 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질투 어린 사랑, 하나의 작은 행동 조차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순간과 장면들.
모든 장면이 책에서 걸어나와 생생한 현실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왜관수도원의 고즈넉한 풍경과, 한 손엔 묵주를 굴리며 천천히 걸으며 기도하는, 영민 하여 아름다운 미카엘의 모습.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할 만큼 사랑한 종교와 수도원이지만,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분노하여 뜨겁게 타는 내면의 불길 때문에 많이 아픈 미카엘의 마음 역시 곧 나의 내면이었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그들 사이의 수많은 오해.
'나한테 냉면집 사모님이 되라고?'라는 말로 요한을 상처 주는 소희, 그 삐걱거림.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려서 풋풋하고, 미숙하여 더 뜨거운 요한의 사랑.
그 모든 것은 내가 지나온 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다시 지나갈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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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무렵은 도서관에 한참 열심히 다니던 때였다. 퇴근 후 오로지 책만 봤다. 아니면 술을 마시거나 내일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 다른 것들을 하며 정신과 육체를 탕진할 게 뻔했고, 그런 날들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며 끊어지곤 하던 때였다. 퇴근 후 도서관으로 바로 가는 행위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때였는데, 그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의미'였다. 나는 매일 매 순간, 무의미의 폭격 속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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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가는 것부터 사람 관계까지 모든 것이 '무의미' 했다. 어떠한 행동에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결국에 나는 왜 사는가?로 귀결되는 질문까지 그 답은 한결같이 '무의미'였다. 나는 그 무의미의 시간 속을 겨우겨우 버텨 나가며 살아있는 시체처럼 연명했다. 하루에 열 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였다. 무의미한데 살고 싶었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었다.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죽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죽으면 안 된다. 그것만은 안된다.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는 '무의미'의 단어 속으로, '죽음'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기 위한 조용한 투쟁은 내 안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만약 그 골짜기로 빠지게 된다면, 그곳은 나올 수 없는 연옥 같은 곳일 터였다.
책 속에도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신부님이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 그 옛날, 독일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토마스 신부님. 전쟁 발발과 그 전후 광기의 분위기 속에서 그를 비롯해 한국에 파견된 모든 독일인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공산군에게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화장실이 없는 좁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자야 하므로 엇갈려 누우면 누군가의 발은 내 코 앞에, 내 발은 누군가의 코 앞에 있게 된다. 그 작은 감옥엔 구멍이 하나 있고 그걸 화장실로 쓰고, 밤이 되면 그 공간까지 덮어 사람이 잔다. 더위엔 땀만 흘리며 서로가 지옥이 되는 좁고 더러운 공간을 견뎌야 하며, 혹한의 추위에서 해야만 하는 혹독한 노동과 굶주림은 기본. 식량은 얼은 무, 썩은 감자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젊은 수녀님들의 코와 귀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기생충들.
토마스의 동료 루트비히 신부는 이미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발이 붓고 복수가 차있는데, 메탄가스가 올라오는 거름을 두드리라는 이상한 노동을 하달받고, 똥밭을 구르는 그의 몸에 득실대는 구더기 속에 끝내 얼굴을 박고 죽는다. 동료의 죽음과 말로 표현이 안되는 끔찍한 광경, 이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토마스 신부님은 절규한다. 늘 그렇듯 자신의 기도에 그 어떤 답도 없는 신에게 따져 묻는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냐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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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모든 인물이 하나같이 고통받으며 절규한다.. 하느님 대체 왜!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불경스럽게도 자신이 섬겨온 신에게 따져 물으며, "당신이 하시는 걸 보면 당신에게 친구가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멱살을 잡았을 것 같다고 악에 받쳐 말한다. 모든 주인공은 신의 의중과, 더 나아가 존재와 역할에 의구심을 품으며 끝내 원망한다. 그중, 요한의 이 말은 내 심장을 무겁게 울린다.
"시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의미를 속삭이고, 우리는 한낱 먼지 속으로 소멸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생명에의 충동만큼 강하게 느끼곤 하지 않는가"
나는 그 충동을 너무 자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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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된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이야기가 확장되는, 동시에 잔잔하게 수도원의 배경을 펼쳐주는 이 소설을 조용하고 외로운 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의 결말은 왠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상투적인 '최루성' 멜로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꺼이 보고 나서 눈물 콧물을 쏟고 마는.. 주인공은 시련을 통하여 성장하고 나중엔 모두 행복해진다, 그리고 결국 짠! 하고 아름다운 결말.. 그렇게 전개될 것 같은 느낌.
이 소설 역시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합쳐져 퍼즐처럼 딱! 맞춰지며 마지막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와 함께 아름다운 여러 문장을 선물처럼 남기며 끝을 맺는다.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으며, 그 상투적인 전개마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속엔 잔잔한 슬픔도, 목을 턱 막히게 하는 슬픔도 있었다. 책 읽는 시간은 충분히 행복했고 아름다운 결에 살을 비비는 느낌처럼 애절하게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을 곱씹으며 흐르던 조용한 눈물은 오열이 되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너무나 소설 같고 잘 짜인 극본 같아 현실성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이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실화'였던 것이다.
그것도 극적인 실화의 아주 일부. 미친 듯이 관련 기사와 사료들을 찾아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가엾으나 더없이 아름다운 생을 살다 가신 토마스 신부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소설 속에 자세히 나오지만, (고초를 못 이기고 돌아가신 분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다행히 본국으로 송환된다. 그러나 어렵게 돌아온 자신들의 고국을 뒤로하고, 토마스 신부님을 비롯하여 송환된 전원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자발적으로' 택한다. 그렇게 다시 이 땅의 남쪽으로 돌아온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는 듯 조용하고 꾸준하게, 사라져 버린 함경도의 그 수도원을 남쪽 나라의 왜관시에 다시 짓는다. 수도원, 성당, 출판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고통도 겪지 않았던 것처럼.
그 수도원은 현재에도 왜관시에 자리 잡아 수사를 키워내는 요람이자 수도사들의 영적 생활 장소로 역할하고 있다.
미국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님은 실은 한국전쟁 당시 요한의 할머니를 포함한 수많은 피난민을 구조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캡틴이었다. 맞다. 우리가 잘 아는 흥남 철수 작전. 12명 정원의 화물선에 만 명을 넘게 태웠다는 바로 그 동화 같은 이야기.
참전 이후 본국에 돌아온 그는, 모든 삶을 정리하고 뉴튼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어 평생을 침묵으로 산다. 그러나 더 이상 젊은 수사가 오지 않아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뉴튼 수도원을, 여러 우연이 (라고 하나 신의 손길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과 여러 갈래의 섬세한 인연이) 겹쳐 극적으로 한국의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인수를 결정하여, 그 캡틴은 몇십 년 전 자신이 구했던 바로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년과 위기의 수도원을 의탁하게 되는 기적 같은 이야기도 있다. 덧붙이자면, 사실 한국의 베네딕토 수도회는 여러 이유로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기 부담스러워 거절의 이유를 찾기 위해 방문한 것인데, 한국 수사들의 방문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된 마리너스 수사는 그들을 만나 메러디스 빅토리호, 한국과의 인연, 참전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난생처음 풀어놓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제 수도원을 방문한 일행 중에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거절의 이유를 찾기 위해 온 여정에서, 마리너스 수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신의 손길이고 계획임이 분명해진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그러나 너무나 명료한 신의 계획.
평생을 침묵으로 살아온 마리너스 수사는 아마 자신은 이 순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직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다며 거짓말처럼 다음 날 숨을 거두게 되는데, 이 역시 모든 것이 실화이다.
그렇다. 현실은 가끔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모든 주인공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깨달은 것이다. 어떠한 공격이든 시련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이 '무의미'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 그것들이 곧 성장의 발판임을 알아차리고 온몸으로 받아 내어 오롯이 통과해내 성장해야만 한다고. "가혹한 현실이 다시 닥치더라도 이 괴로움을 다시 겪는다 하더라도 학대하는 그들 편에는 서지 않을 것" 이라던 거름 더미 위에서 죽어간 루트비히 신부님의 말씀처럼.
이 든든한 한 권의 책을 곱씹어 읽으며, 내게 여러 속삭임으로 다가오는 '무의미'를 물리 칠 힘을 얻는다. 모든 덧없음과 무의미가, 여러 얼굴로 나에게 오는 '악'의 다른 면임을 의식하면 '무의미'는 힘을 잃어갈 것이다.
단편적으로 감상문을 쓰다 보니 소설의 힘이 약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나지 않던 책 내용 몇 가지를 검색 해 찾아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책 속의 문장에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을 참기 위해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훌륭한 소설이고, 실화라는 사실이 아름답도록 아픈 이야기이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준 공지영 작가에게 참 감사하고, 서사를 예리하나 무겁게, 남몰래 숨겨 놓을 줄도 풀어놓을 줄도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과 동시대를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