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마카오로 쓰는 편지

선배 안녕,

by 떠돌이

선배는 어엿한 지점장이 돼있더라. 그 지역의 책임자

출장은 많이 다녀도 외국에 상주하며 일을 해본 적은 없는터라 왠지 그럴듯해 보이고 멋있어 보였어. 선배는 후배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늘 열심히 사는 사람의 표본 같은 느낌이었는데 역시나 했지.

내가 폭탄머리를 하고 다니던 새내기 때, 선배는 대부분의 후배와 동기들에게 호감을 얻는 무난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마 본인도 잘 알겠지. 시간이 어떻게 이리 빠른가 싶었는데 초기 멤버로 입사했다던 선배 회사가 점점 커지면서 선배가 지점장이 되다니. 부럽고 멋있기도 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약간 질투도 났던 것 같아.


한번 오라는 선배의 말을 덥석 물고, 후배랑 같이 가기로 하고 발권까지 했는데 막상 후배가 발을 빼니까 좀 꺼려지더라고. 아무리 선후배라 해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 혼자 간다는 거에 잠깐 주춤했는데, 사실 뭐 워낙 여행을 다녔으니 도미토리도 잘 썼던 내가 신경 쓸건 아니었지. 문제는 선배아는 사람이라 신경 쓰였던 건데 화장실도 따로 있고 집에 거의 없다는 선배 말에 별생각 없이 갔던 것 같아. 여행 중에도 남자 일행과 잠깐 동행할 때도 있었으니까 하는 대수롭지 않은 기분으로. 예상외로 쾌적한 집과 멋진 뷰, 그리고 정말 선배 말대로 손님용 방이라 그런지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더라. 나 짐 왜 이렇게 많이 싸왔나 싶을 정도로 편하고 좋았어.



선배 정말 고마웠어. 기꺼이 자신의 거처를 떼어내 타인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좋은 식당에 함께 가 주고 좋은 곳에 데려 가 주고. 홍콩 여행하면서 느꼈는데, 선배 아니었음 그때 그렇게 못 다녔을 거야. 그쪽 문화권이 공휴일에 얼마나 붐비고, 얼마나 비싸지고, 얼마나 문 닫은 가게가 많은지 이번에 몸소 실감했거든. 내가 갔을 때도 사실 노동절이 끼인 큰 연휴였잖아.





술을 마시지 않는 선배와 어느 하루는 둘 다 만취할 때까지 한국식당에서 술을 마셨지. 여행 중 그날 하루 내가 몸살이었나, 암튼 지독히 아팠는데 선배가 한식 먹으면 낫는다며 날 끌었던 한국식당에 갔던 그 날, 그 날이 참 후회된다. 며칠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찌질한 구석들을 선배한테 보였던 것 같아. 왜? 나도 모르겠어. 선배가 부러워서 아님 선배가 좋아서 마음을 얻고 싶어서 혹은 둘 다 일수도 있겠다.


둘 다 몹시 취했고, 집까지 같이 돌아왔고, 나는 내 방에 있었고. 선배 방에 잠깐 들어갔고. 그것까진 기억이 나. 그 후로 술 때문에 끊어진 기억은 다음날에도 돌아오지 않더라. 무슨 일 때문인지 선배는 냉담해져 있었고.


도저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맞춰지지 않는 파편들 속에서 답답함을 안고 물어봐도 대답 없는 선배에게 고작 들은 말은 내가 선배에게 했다는 말.


"선배 왜 이래요, 애처럼 굴지 마요"


선배, 있잖아. 나 좀 바보 같고 이상한 자존심과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어. 저 말이 딱 그래. 만약 선배가 내게 보여준 마음에 대한 대답으로 내가 한 말이 저따위라면 나라도 상처 받았을 거야. 근데 저거 정말 장담하는데 내 마음에도 없는 소리야. 젠장!!

다음 날 숙취든 뭐든 그냥 떠났으면 될 걸 나는 왜 선배한테 질척거렸을까? 깔끔히 항공권 바꿔서 떠났어야 했는데 그마저 선배가 해결해준 거라 선배한테 바꿔달라고 말해도 그냥 흘려듣곤 출근하러 가버리더라. 휴가 냈다고 스케줄표까지 보여줬으면서 굳이 갈필요 없는 회사를 말이야.


이후로 며칠 동안 선배 맘을 돌려보려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했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 나 너무 질척거렸나 봐. 그래서 그건 그것대로 미련이 없긴 해. 아쉽긴 한데 그래도 미련은 없어. 다만 한 가지 후회되는 건 혼란스러웠을 선배에게 시간을 좀 주고, 그 후에 질척거려 볼 걸. 그럼 우리 사이가 좀 달라져 있지 않을까. 이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살지 않지는 않을까.






선배 나 사실 지금 홍콩에 있어.


홍콩을 다녀온 지 이틀 만에, 다시 홍콩행 비행기를 탔어. 선배는 웃으며 말할지도 모르겠다 역시 너답다.

선배가 홍콩에 있는 직원과 친한 것도 알고 홍콩에 자주 오는 것도 알고, 내가 마음먹으면 마카오에 갈 수도 있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알겠는 건, 선배가 나를 별로 반길 것 같지 않다는 거 하나였어.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어.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마카오로 할까 했지만 혹시나 마주치게 될까 봐 그렇게 하지도 않았어. 근데 이틀 만에, 짐을 채 풀기도 전에 다시 여기 와있네. 무슨 생각인진 나도 몰라. 사실 이제는 선배 연락처도 모르고.

잠 오지 않던 밤 혹시나 해서 SNS를 찾으니 바로 선배가 나오길래,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 중이야.



남들 사진 안 찍어준다는 선배가 찍어줬던 많은 사진들은 아직 내 폰 속에 고이 있어. 고작 이년 전인데 나 굉장히 어려 보이네. 그리고 같이 못 갔던 그 후배는 결혼까지 했고.



혼자 조용히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던 여기, 참 좋았다



선배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늘 건강하길 바라.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며 볼 수 있겠지? 그때 못 갔던 홍콩, 정말 좋네. 혼자 여행한다는 것의 즐거움을 많이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그 시간들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어. 현지에 사는 지인 한 명 만났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고마웠어.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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