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로 가기 위한 준비
백수가 된 지 정확히 6개월이 넘었음을 정직한 실업급여 지급 날짜 마감이 알려준다.
나이 때문일까? 성별 때문? 경력 때문?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나는 이 공백의 시간, 아니 오롯이 나만의 개인적인 시간 동안,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잠시 접어두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작년 태국 여행 이후, 나는 새롭게 시도한 여행 방법이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을 얼마나 다르게 채울 수 있는지 몸소 실감했다.
예전의 나는 늘 게으른 여행자였다. 게스트하우스 밖에 잘 나가지 않았고, 여행지나 유명한 곳에 잘 들르지 않았다. 밤이 되면 혼자 술을 마시거나 책을 보거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곤 했다. (이럴 거면 여행 왜 왔니!) 새로운 곳을 가기보다 한번 찾은 로컬 맛집을 매일 드나들었고 보통은 전혀 유명하지 않은 골목길을 걸었다. 여행에서도 사람 많은 곳을 피하는 습관은 여전했다. 그것은 그런대로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웬만하면 몸을 일으켜 무엇이든 한다. 유명한 곳도 마음이 동하면 들러본다. 축척된 경험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체험과 경험의 시간들이 나를 이룰 것이다. Authority가 되어 내 이야기를 이룰 것이다.
이번 여행지는 발리와 그 주변.
예전부터 요가와 서핑을 배워보고 싶기도 했고, 스쿠버 다이빙의 천국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저번 홍콩 여행에서 본 충격적 사건 때문에 스쿠버 다이빙은 아직 미지수. 그러나 발리는 여전히 내게 한 번쯤 길게 머물러 보고픈 여행지였다. 오래전 여행에서 만났던, 가끔 연락을 하는 친구가 현재 발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게 시간이 많다는 우연이 더해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겸 발리를 여행하기로 했다.
작은 실수가 있었다면 나의 첫 목적지가 발리가 아닌, 현재 친구가 체류 중인 길리 아이르라는 섬이 됐다는 것인데, 그쪽에 가까운 공항으로 비행기표를 끊지 않은 것과 한 달 무비자인 인도네시아의 룰을 깜빡 잊고 한 달이 넘는 일정을 왕복으로 발권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일하게 국내 저가항공처럼 국외 저가항공사도 당일 취소 및 변경을 해 줄 것이라 순진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안됐다. 자,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뭐 하루 공항에서 밤을 새우고 개고생 해서 배 타고 직접 길리 아이르로 들어가면 되고, 공항에서 나올 때는 페널티를 물고 나오면 된다. 몸고생, 시간낭비, 돈으로 때우면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다음 여행까지 고려해 야심 차게 받고자 준비했던 PP 카드는 다음의 이유로 발급받을 수 없게 됐다. 1. 내가 현재 직장이 없다는 것 2. 내 명의의 집이 없으며 3. 미혼이라는 것.
아!!!! 왜 나는 회사 다닐 때 PP 카드를 안 받았을까. (사실 그땐 필요가 없었다. 공항에 오래 머물 시간도 없었고, 필요한 경우 경비처리가 되었으니까)
국제선 왕복 티켓을 끊은 후 겪은 위의 상황은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지만 견딜만했다. 뭐 내가 실수한 거니까.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발리의 국내선 항공사 결제가 먹통이라는 어마 무시한 상황.
일반적으로 길리 아이르로 가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길리섬 모두 같은 방법)
1. 발리 공항 도착 -> 국내선으로 이동하여 롬복행 탑승 -> 롬복 도착 후 택시로 항구까지 이동 (삐끼가 그렇게 많다고 하며 흥정이 어려움) -> 10분여 배를 타고 길리 아이르 도착
2. 발리 공항 도착 -> 택시를 타고 항구로 이동 ->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길리 아이르 도착
나는 처음 1번을 택했다. 삐끼를 뚫고 나와야 하고, 항구까지 안 가는 이상한 꼼수를 부리거나 사설업체 이상한 곳으로 데려간다는 글이 인터넷에 수없이 많았지만 우선 배 타는걸 너무 싫어하는 데다 1,2번 경로의 가격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발리-> 롬복 공항행 국내선을 예약하는데 결제가 안된다. 새벽 세시부터 아침 열 시까지 장장 7시간을 애써봤지만 허사였다. 나는 처음에 Lion air 사를 저주하고, 나의 핸드폰과 카드사를 저주하고, 피곤과 짜증에 지쳐 포기하다 결국 발리에서 배를 타는 티켓을 끊었다. 사투를 벌이던 7시간 동안 어찌어찌 흘러간 어떤 카페에서 댓글을 보니 국내 소셜에서 파는 티켓이 있고 공항 픽업까지 해준다는 것이다. 배는 오래 타야 하지만 값이 저렴했고 무엇보다 절차가 간단하며 국내 소셜 사이트에서 예약 및 결제까지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공항에서 나와 삐끼 사이를 뚫고 항구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여행을 혼자 여러 번 다녔지만 나는 여전히 삐끼들이 두렵고 불편하다. 그들은 혼자인 동양인 여자에게 사기를 치거나 희롱하는데 익숙하고 나는 그러한 경험을 수없이 많이 당해봤다. 무시한다해서 불편함과 불쾌함이 가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종과 성별 때문에 더 잦은 빈도와 횟수로, 더 높은 강도로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내게는 더 짜증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진다. 방콕에서 카오산에 거의 가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느 관광지에나 있는 이들이건만, 몇 년 사이 그들은 더 진화해서 이제는 직접 신체 접촉으로 팔을 잡아끌거나,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와 "왁!"하고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 뒤 나의 반응을 보며 이죽거리며 즐거워한다. 오랜 여행에도 나는 이런 것들이 익숙해지지 않았고 두려웠으며 몸서리치게 싫다.
처음으로 출발 전 미리 짐을 싸 본다. 보통 떠나기 하루 전이나 혹은 당일날 짐을 싸는 일도 빈번했으니 꽤 발전했다. 1달을 다녀도 15kg을 넘은 적이 없는데 이번엔 이것저것 다 넣어봤더니 무게가 꽤 나간다. 여행지의 특성상 평소보다 챙길 것이 많다. 요가복, 수영복, 드라이기 등. 최소한으로 꾸리기 위해 애써본다.
최소한의 금액을 루피아로 환전하고, 적절한 노트북을 하나 구매하고, 짐을 다시 한번 싸고나서 이번 주말 나는 비행기에 오른다. 늘 그랬듯 설렘보다 우선인 것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나를 보고 용감하다는 이들은 내 속에서 이는 두려움을 모르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는 설명을 멈추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약 한 달 동안 나는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우주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 겨우 사진 보정을 해야 보이는 창백한 푸른 점, 그중에서도 아주 티끌 같은 곳에 그보다 더 티끌 같은 존재로 지내게 될 것이다.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용기 낼 것, 조심하되 두려워하지 말 것, 건강할 것, 가끔은 즐거울 것. 이것이 여행의 목표이자 바라는 것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