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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Apr 18. 2019

발리에서 생긴 일

내게도 이런 일이

여행이란 것이 참 묘하다. 인생이 예측대로 안되듯 인생의 일부인 여행 역시 그렇다. 뜻대로 흐르지 않는 삶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인 것 같다 생각을 종종 한다.


시작은 와이안이었다.

보름을 머문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인니 청년 와이안. 항상 내 방을 청소하고 아침을 만들어주는 와이안은 나의 학생 때를 생각나게 했다. 나도 민박집에서 배낭여행객들과, 출장자들과, 정신 나간 주인 아래서 비슷한 일들을 했었지 하며. 그런 와이안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다.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고 싶었고 현지인만 알법한 숨은 로컬 맛집도 가보고 싶은 심산이었다. 떠나기 바로 전날은 짐 싸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이틀을 남겨둔 저녁, 같이 밥을 먹자고 하니 자신의 보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이해한다. 직원이 손님과 밥을 먹는 건 민감한 문제일 수 있으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 집 마나님쯤 되는 유니 말로는 와이안이 영어도 잘 못하고 부끄러워 나와 저녁 먹기를 내심 불편해한다는 것. 차라리 돈을 주라는 말에 그러마 했다. 와이안의 퇴짜 덕분에 나는 쓸쓸히 스테이크 맛집으로 갔다.



불친절한 듯 친절한 듯 애매한 직원과의 대화 끝에 스테이크 큰 것과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 식당이었다. 어쩐지 매일 내리던 오후의 비도 오지 않던 그날의 우붓, 분위기가 할 일 다 하는 비싼 맛집에 혼자 온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맞은편에 나처럼 처량한 여행자 한 명이 혼자 들어와 식사를 했다. 눈이 자꾸 마주쳤다. 인정한다 내가 계속 쳐다봤다. 그에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여행 중에 나는 한 번도 이런 곳에 혼자 온 남자 여행자를 본 적이 없었다. 다양한 국적의 혼자 여행을 하는 (주로 여자였던) 많은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도 가끔 나눴지만 이런 고급 식당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머릿속은 혼자 소설을 써댔다. 발리 와서 실연당했나?


 몇 번의 시선이 오고 가고, 멀리서 잔을 들어 리모컨 건배를 하는 그에게 응답하기 위해 잔을 들었지만 이런 문화에 익숙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건배까지 였다. 나는 소심한 아시안 아니던가!! 그러므로 수줍게 고개를 돌려 내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켤 수밖에. 여행의 끝이 다가와서일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남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고 그는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 눈인사를 하는 그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흔한 대화의 시작, Where are you from?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와 대화가 시작됐다.


내게 와인을 한 병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먹은걸 계산했고, 새롭게 테이블이 차려졌다.





요즈음의 내가 느끼는 건 내 주사가 몹시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인데, 1. 굳이 안 해도 될 내면의 이야기를 하거나 2.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거나 한 말 또 하거나 3. 기억이 부분 부분 끊어진다는 것. 이 날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이미 와인 한 병을 마셨고, 여행의 말미에 잠을 제대로 못 자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즉 취할 가능성은 더 높고, 헛소리 할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그는 외국인. 내가 아무리 영어가 가능하다 해도 원어민과 막힘없는 수준은 아닌지라 걱정했건만 기우였다. 술은 내면의 포텐을 끌어내는 마법의 도구 아니던가. 취준생 때 오픽 시험장에 술을 마시고 들어갈까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그의 '배려 영어'까지 더해져 우리의 대화는 즐거웠다.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꿈꾼다고 했다. (이 무슨 개소린가. 요즘의 주사는, 이렇게 내면의 말이 막 튀어나오는 것이다) 진짜 남친은 아니고 여행지에서 잠깐 스치는 인연. 서로의 여행을 더 즐겁게 만드는 여행 메이트. 기분 좋은 설렘. 이제 여행도 끝나가니 안될 건 뭔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술은 나를 더 호기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과장 좀 보태 우주 대 스타였다. 공익 광고에도 출연했고, 빌보드 광고도 찍었으며 다른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 잘생김보다 웃음이 빛나는 외모였고 스스로도 그걸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장난꾸러기 얼굴에 성격 역시 그러하였으므로 우리 대화의 약 50% 이상은 Crazy와 Bull shit으로 이루어진 장난스런 대화였다.



다른 언어를 쓰는 문화권에서 온 우리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해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을 매우 가깝게 대고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촛불과 조명밖에 없는 식당, 게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 야외 테라스에서 우리는 바로 옆으로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보며 동시에 오우썸과 로맨틱을 외쳤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 큰 우산 같은 셰이드 속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 말을 할 때마다 가까워지는 얼굴, 이거 완전 키스각 아냐?!


내 마음이 들렸나?? 싶게 떠오른 생각과 동시에 키스해도 되겠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정색했지만, 또 안될 건 뭔가 싶어 그의 볼에 내가 키스했고, 이후 다가오는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부드러웠다. 머릿속에 종은 안 울렸건만 아드레날린은 대폭발 했다.

내겐 여행 처음, 상대와 함께 찍는 비포 선라이즈였다.



헤어지기 아쉬워 피자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을 조금 더 마시고 나와서 기분좋은 취기에 서로 손을 잡고 우붓 거리를 걸었고, 진심으로 행복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둘이 함께 걷는 밤길엔 오토바이 기사들의 캣콜링도, 어떤 위협도 없었다. 설렘과 인간적인 연대가 공존하는 이 느낌, 이 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랬다. 내 게스트 하우스 앞까지 도착해서, 우리는 굿나잇 키스 치고는 조금 더 끈적한 키스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다음 날 나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의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비포 선라이즈도 딱 하루 아니던가.

그러나 그가 어제 그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처음엔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상통화를 걸어와 식겁했으며, 그날 오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안 하던 화장까지 해 가며 혹시나 늦을까 봐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문을 닫는 환전상까지 불러 세워 돈을 환전하고, 습하고 더운 우붓 거리를 다시 뛰듯이 걸어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몹시나 떨렸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늦는다는 메시지가 왔다. 조금 더 늦으면 그냥 혼자 스테이크 열심히 썰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십 분처럼 느껴지는 십오 분이 지났을까? 뛰어오는 그가 보였다.

그가 내 남친이라면 늦음에,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음에 대해 신경질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진짜 마지막 밤이 아니던가. 게다가 남친도 아니지 않은 그에게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전날 다친 다리 때문에 내가 알려준 곳에 가서 마사지를 받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나름 단장을 위한 최선이었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모기에게 수없이 뜯기는 나를 위해 모기 기피 팔찌를 가지고 뛰어 온 것이었다. 친절한 설명이 고마웠다.


그가 말한다.

어제 우리 미쳤지?

어, 미쳤어. 왜? 나 미친 거 좋은데

나도 그래.


식사를 다 하고 뭘 할까 하다가 그가 제안한다. 그의 숙소에 멋진 발코니가 있고, 거기서 술을 마시자고. 나는 발코니가 멋지지 않으면 당장 돌아가겠다고 했고 나쁘지 않은 발코니에서 그는 맥주를, 나는 와인을 마셨다. 숙소로 향하는 길, 와인을 구하기 위해 저 앞 슈퍼로 먼저 쫄래쫄래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귀여웠다. 와인에 맥주에, 비닐봉투가 모자라 박스를 들고 나선 그에게 말했다. "짐꾼! 출발합시다!" 빵터진 그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며, 크레이지 코리안을 만났음에 맘껏 즐거워했다. 정상이 아닌 나랑 대화하는 너도 정상은 아니야, 나쁜 화이트 아프리칸아. 대부분의 말은 장난이고 농담이었다. 짧은 시간, 우리의 대화는 그래야 했다.



그의 발코니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슬픈 가족사, 그가 왜 발리에 혼자 오게 됐는지, 내가 스물다섯이라고 뻥 쳤던 것에 대해 속은 자신에 대한 분노, 돈이 많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뭘 하고 싶은지.

그도 나처럼,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에겐 많은 이야기가 쉬웠을 것이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어릴 적 호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 사람.

얼마 전 오랜 시간 함께한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키우던 고양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 슬픔을 내색하기 어려웠던 사람.

쓰러진 아버지를 오랫동안 돌보는 지옥을 엄마와 함께 겪고 있는 사람.

그러나 모든 걸 장난으로 웃어넘길 줄 아는,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조카 바보,

웃는 얼굴이 귀여운 사람.


그것이 내가 만난 앤드류였다.



나는 그를 4월에 만났으니 사월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는 계속 나이를 속이는 내게 그래 너 어려서 좋겠다, 라며 Young Bali라고 불렀다.


술에 취해, 늦은 시간 덕에 졸려하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 주다 일어섰다.

바래다주겠다는 그를 만류하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이제 정말 짐을 싸야 했고, 떠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나는 마사지를 받고 유명한 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밥집인데, 티비에도 여러 번 나온 진짜 맛집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맛있었는데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나는 억지로 파스타를 입에 떠 넣다 관뒀다. 머리는 멍했고, 머릿속을 유영하는 앤드류 생각은 이상하게 감정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러나 연락하지 않았다.


식사를 두 시간쯤 하다, 그마저 관두고 병든 개처럼 거리를 시속 10m 처럼 느리게 걸었다. 뜨거운 땡볕 아래서, 짧은 시간 빠르게 흘러간 로맨스의 후유증을 제대로 앓는 것 같았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진지할 것 없다고, 우리는 역할놀이를 하는 거라고, 서로의 진짜 삶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게임이라고 내가 말했건만 이틀간의 로맨스 후에 혼자 마음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 청승아.


그는 자고 있을까?

나도 이렇게 피곤한데, 아마 곤히 자고 있겠지. 깨워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서로 싸웠다. 두 마음이 싸우는 동안에도 서글픈 건 서글픈 거였다. 발리에서 유명하다는 나무 도마를 사고 어슬렁 거리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싱숭생숭 당췌 진정되지 않아 길에 파는 부처님 헤드라도 사서 싸가지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이 변할까 얼른 유심을 바꾸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일찍 잡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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