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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Apr 20. 2019

발리에서 생긴 일

진짜, 비포 선라이즈

공항 출발 택시 예약은 4시였지만 기사는 조금 일찍 와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택시에 올랐다.

공항으로 가는 길 위에서 솔직히 조금 울었다. 나는 청승맞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운 적도, 그래서 운 적도 없었다. 이번에 내가 울었던 건 아마 앤드류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은 섞여 있을 것이다.


후회됐다. 앤드류에게 세이 굿바이를 하지 않은 것. 

짐을 다 싸고, 떠나기 전까지 연락을 꾹 참는 동안 나는 내가 후회할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았고, 사실은 기대했다. 내가 마지막 식사를 했던 식당은 꽤 유명하니 혹시 그곳에서 마주치기를. (무슨수로? 유명한 식당은 백개도 넘는데) 혹은 내 게스트하우스를 기억한다면 그곳으로 찾아와 주길.


물론 그런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 택시기사의 암내가 너무 심해 좀 더 우울해졌다. 기사의 미친듯한 가속으로 한 시간도 안돼 공항에 도착했다. 덕분에 시간은 너무나 많이 남았고 괜히 기사가 원망스러웠다. 공항으로 들어가 전광판을 올려다보니 다행스럽게 해당 항공사의 체크인 카운터가 오픈된 상태였다. 괜히 피곤했다. 짐을 빨리 부치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중국인이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많았다. 전광판 앞에 무리를 지어 통행을 방해하는 중국인들 틈을 비집고 나왔더니 체크인 카운터가 너무 멀었다. 나의 카운터는 E, 증축된 공간인지 다른 항공사 카운터와는 달리 저 멀리 돌아가야 했다. 중국인들의 소란 속에, 내 이름이 들렸다. 환청까지 들렸다 제기랄. 엉엉. 무거운 캐리어를 밀고 거북이걸음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나 또박또박, 다시 내 이름이 들렸다. 그리고 연이어 들리는 소리.


"Young Bali!!"


오 마이 갓,


뒤 돌아보면 앤드류가 서 있겠지. 우습게도 그 순간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마음에 안 드는 옷차림이었다. 공항에 온다고 너무 편하게 입고 온 내 옷차림.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생각을 앞질러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중국 단체관광객들 뒤로 머리가 두 개쯤 더 큰 앤드류가 저기 서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자연스러울까.


그냥,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앤드류가 웃으며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나도 앤드류 쪽으로 걸어갔다. 서로를 마주 보고 열렬히 뛰어가 포옹하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천천히 그를 보며 미소를 지은채 걸어갔다. 사실 너무 좋아서, 경박스러운 웃음소리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청승맞은 나는 가까이 마주 서게 된 그의 눈을 보다가, 그냥 그를 안아버렸다. 내 머리를 오래오래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혼자 감정이 격해져 결국엔 어깨까지 들썩이며 끅끅댔다. 이럴 거면 그냥 연락을 하지 이 무슨 청승이란 말인가. 그의 티셔츠엔 내 눈물 콧물이 다 묻었을 것이다. 눈물은 그렇다 치고 콧물은 어떡하지. 휴지가 주머니에 있던가. 젠장.. 

그는 끅끅대는 내 어깨를 꽉 안고,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내 뒤통수를 안으며 쓰다듬고, 머리에 연신 키스를 해댔다. 이건, 그러니까 이건 나 혼자가 아니라 정말, 진짜, 레알 비포 선라이즈였다. 적어도 그가 공항으로 달려 올 정도로는 내가 그리웠다는 뜻이다.





그가 공항까지 오게 된 과정은 이러했다.


어젯밤 발코니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내 택시 출발 시간을 말했었다.

내가 떠나기 전, 서프라이즈 하게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내 숙소가 기억이 안 나더란다. 결국 서프라이즈를 포기하고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가 전혀 확인을 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다가, 택시를 타려니 하필 길거리에 넘쳐나던 그 많던 택시도 안보였단다. (그 날은 선거일이었고, 나도 하필 그날 숙소 주인이 애원하다시피 자신의 '남편 기사'를 이용하라고 해서 예약했건만, 당일 취소하여 황당 그 자체였다) 결국 다시 자기 호텔로 돌아가 프런트에 부탁에 부탁을 하여, 뒷돈까지 찔러 준 후에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고 무작정 공항으로 와 내가 타는 항공사와 Departure Gate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새삼 공항까지 빨리 와 준 기사에게 고마웠다. 참, 다시 한번 여행이란 알 수 없어 묘하다.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고 또 나쁜 게 나쁜 것 만도 아니다. 아까는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나 싶었는데, 이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짧지만 귀한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함께 카운터로 가 내 짐을 부치고,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헤어짐을 애틋해하는 연인처럼 오래오래 손을 잡고 있었다. 더는 장난스러운 이야기는 없었다. 이젠 정말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출국장으로 가면 그는 따라올 수 없기에 정말 안녕이므로, 진심을 말할 시간이다. 그는 나를 만난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너무나 행복했다고, 그 짧았던 시간이 자신의 여행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를 정성 들여 오래 설명했다. 그 기억으로 오랜시간 행복할 것이라 말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나도,라고 대답은 했지만 내 진짜 마음을, 앞으로도 느끼게 될 그리움은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번의 행복을 잊지 않겠다고 앞다투어 주장하듯 말했다.


출국장 앞에서, 이틀 전 내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굿바이 키스 치고는 아주아주 길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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