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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01. 2019

조용한 분노

담담하고 조용한 분노로 쓰인 한 의사의 슬픈 서사 - 이국종의 골든아워

한 편의 글이나 기록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질까? 그 기록 속에 담긴 사실이나 진심 같은 것들은 독자에게 어떻게 닿을까.


한 의사가 있다.

그가 일을 할수록 적자를 낼 수밖에 없는 업무의 특성 때문인지 병원 내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을 함에도 다양한 출처의 비판과 원색적인 비난은 병원 담장을 타고 안팎으로 들려온다. 반복되는 좌절과 걍팍한 일상, 그것으로 그의 업무에 대한 감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그에게 해결방법이 없거나 난해한 문제들이 꾸준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곁에 산재 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한 언론인이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일들, 그 밖의 것들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제안한다. 수없이 겪어온 다양한 종류의 좌절을 토대로 의사는 자신에겐 그것들을 기록할 힘도, 의지도 없음을 알리며 정중히 사양하지만 그럼에도 언론인은 설득한다. 남겨질 기록은 당신뿐 아니라, 함께 고생해온 이들의 흔적과 과정을 남기는 것 만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책 속에서 의사의 말투는 담담하나 냉소적이다. 상처 가득한 이의, 어쩌면 체념하는 듯한 말투로 가득한 기록 속에서 그는 그저 어느 먼 훗날이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참고용으로 나마 그의 기록이 쓰이길 바라며 언론인의 뜻을 받아 세상에 그의 글을 내놓는다. 그렇게 나온 책이 외상외과 의사 이국종의 '골든아워' 다.


소설이라 하더라 꽤 팔렸을 만큼 그의 글은 재미있고 흡인력 있다. 그가 책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서술의 흔적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책을 한숨에 읽어 내려가는 일은 내겐 너무 버겁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의 나열들이고, 전혀 다른 업을 가지고 다른 세대를 살아온 나에게도 그가 겪는 고뇌는 고스란히 전달되어 내가 겪어오고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 내 안의 것들을 휘젓기에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이 편치 못한 까닭이다. 읽고 싶은 마음과 힘들어 내려놓고 싶은 마음, 양가적인 감정이 내면에서 신경전을 벌인다.




윗선에선 도저히 그에게 주어진 인력과 자원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주문한다.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근거 없는 비난과 추문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밥벌이를 할 뿐이며 자신의 업을 이어나갈 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이어가기 위해, (보통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맡겨진 직책을 수행하는 당연함을 위해 그가 감당하고 설득하고 비굴해져야 하는 순간들이 종종 언급되고 실상은 더 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그에게 비난과 압박을 쏟아내는 윗선에게 그는,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공식적으로 외상센터를 닫을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어 운영되고 있는 이 센터도, 자신이 함께하고자 설득했으나 정작 개인의 삶을 무너뜨려가며 팀을 꾸려가는 팀원들도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뿐 공식적으로 그의 외상센터를 폐지하지도, 그를 해고하지도, 보직 변경을 발령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에 피 묻히지 않고 그저 그가 쓸쓸히 자리에 남아 자멸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악화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걱정보다 그로 인해 자신의 팀에게 요구될 희생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심지어 죽은 이를 부러워하는듯한 그의 독백은 그가 얼마나 쓰디쓴 입맛으로 매일을 견뎌내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아래는 아버지의 산소에 간 날에 대한 그의 독백이다.


나는 어디까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버지는 답이 없었다. 그가 누운 자리는 평안해 보였다. 영면한 아버지의 자리가 부러웠다. 그러나 나의 끝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서글프도록 허망하기는 했으나 산 날들이 대개 온전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골든아워 2권 305p>


실제로 해당 사업에 힘을 쓰고 있는 많은 이들의 이름과 간략한 소개가 책의 말미에 약 100페이지 정도 언급되어 있는데, 책의 한 챕터로 씌여질 만큼 저자가 의지했던 의사 출신의 한 행정가는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에서 유명을 달리한 채 발견되었다. 때는 설 연휴 전이었고,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심정지로 추정되었다.

신문에서 보았던 저자가 쓴, 고인에 대한 부고에 담겨있던 쓸쓸함과 조용한 분노를 기억한다.


이 사회는 언제까지 또 어떻게 이토록 수많은 이들,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이들에 의해 지탱돼야 할까. 진절머리가 난다. 엄청난 흑자를 내고도 망해가는 회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적이 경험이 있다. 내가 일군 성과는 속절없이 사라져 갔고 그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같은 봉급을 밀린 채로 대표는 가족여행을 다녔다. 개판인 회사와 사회 시스템이 어찌 이리 똑같을까.




아마 내가 쓰는 이 글은 매우 두서가 없을 것이다. 나는 감정적이고, 차분함을 가장하는데 능하나 이성적이지 못하여 저자처럼 분노를 서슬 퍼렇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둘 뿐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픈 것은. 일하지 않음에도 노동하지 않음에도, 그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움에도 이렇게 심신이 아픈 것은. 그러나 저자의 삶을 보며 나는 나의 아픔 조차 사소하여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쉬고 싶다 해도 환자들은 줄지어 들어오고, 일 년 동안 집에 거의 가지 못한 그의 동료를 집에 보내고 싶어도 환자는 줄지어 들어온다. 동료에 대한 죄책감에 더해 본인의 몸이 망가지고 수술이 어려울 정도로 한쪽 눈이 실명해가는 와중에도 환자는 들어온다. 다른 병원은 수술이 복잡하고 의료수가가 맞지 않는 '적자 환자'를 그가 있는 외상센터로 전원시켜 버리고, 시간싸움 아래 있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항공수송을 하지만 관련자와 지휘체계가 바뀔 때마다 그는 헬리콥터를 띄우는 것에 대해 눈치를 보아야 하고 굽신거려야 한다. 헬리콥터의 소음에 대한 민원은 보너스고 이로 인해 윗선의 압박은 플러스알파, 이것이 봉급쟁이 의사 이국종의 삶이다.


이미 예정된 일들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면서 해나가는 것은 고역이었으나 직장생활이므로 그냥 했다. 권역외상센터가 가시화되면 모든 것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멍청한 착각이었다. 눈 때문에 생긴 내 공백을 정경원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몸을 던져 꾸역꾸역 메워나갔다. <골든아워 2권 163p 중>





그는 그가 노동자임을 명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그와 그의 팀, 환자에게 가 닿지 못하는 실효성 없는 정책들과, 입법되거나 논의되었다가 무산되는 정책들에 분노한다. 실제 그의 기록을 보면 거창한 외상센터에 대한 법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의 팀원들은 모조리 노동법 위반 아래서 일하고 있는데 (노동시간에 관한 법률), 그에 대한 지적은 상부에서 계속해서 내려오지만 인원 충원은 없다. 그의 말처럼 그의 주변은 삶을 떼어내 팀을 꾸려가는 그와 그의 팀이 그저 자멸하길 바라는 것만 같다. 누구도 자신의 손에 피는 묻히고 싶지 않지만 그의 팀은 얼른 좀 없어져주길 바라는 그런 상황. 그럼에도 그는 그저 밥벌이이므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환자는 밀려 들어오므로 환자를 위해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이 감정을 토해내며 혼자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어디선가 그는 환자를 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이 잘 살길 바라는 것이 욕심이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리 만만한 곳도, 정의로운 곳도 아니다. 그저 이런 이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의지가 꺾이지 않을 정도 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이 되길 바란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 나는 끝없이 예민하며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자고 오늘도 다시 한번 생각한다. 대단한 정의는 못 되더라도, 이러한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갈 것이다. 그저 의사 이국종과, 그처럼 일하는 사회의 많은 이들이 단단하게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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