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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ul 26. 2019

피 땀 눈물

처럼 삶에 깃든 강렬한 기억들

외국인 고객과의 회식 자리에서 소주를 마음에 들어하던 고객이 한국인에겐 소주라는 술이 어떤 의미냐고 물은 적이 있다. 배를 타고 세계를 30년이나 돌아다니셨다는 상무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시며 이건 그냥 술이라기보다 애환이 담기고 또 즐거움도 있는 술인데.. 라며 설명을 망설이셨다. 그 자리의 막내이자 모든 잡무를 맡고 있던 내가 그 질문에 답하게 되었다.


이건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의 즐거움, 슬픔, 그리고 가끔은 눈물이 섞인 맛 같은 거예요. 혹은 그런 감정들과 함께 마시는 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옛날엔 가장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잔 반주로 마시는 친구 같은 술이었고,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술 중 하나입니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그 쓴맛이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위로 같은 것이에요.


고객은 작은 잔을 들어 한 참을 바라보다 한 잔을 더 마셨고, 상무님은 20대인 나의 통역이 우스웠는지 하하 웃으셨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했다.


사람에게 무언가 장점이 있다면 엄마에게 그것은 요리 솜씨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모습은 늘 해가 지기 전 앞 베란다를 자체 개조한 부엌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던 모습이다. 넓지도 않고 오히려 좁은, 지금 떠올려보면 허술하고 그저 그런 부엌 이건만 그곳에서 수많은 끼니가 만들어졌다.


당시엔 생소했던 2구 가스레인지 아래에 그릴이 있는 최첨단 제품으로 엄마는 생선을 찐 뒤 칼집을 내  간장과 다진 야채로 만든 양념을 부어 구워냈다. 생선요리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저녁엔 꼭 잘 요리된 메인 요리가 하나 이상 상에 올랐다. 어느 날은 도미찜 혹은 그걸 다시 구워낸 것, 어느 날은 굵은소금만 뿌려 끝을 바삭하게 구워 낸 갈치, 어느 날은 고등어구이와 조림.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저녁상은 늘 화려할 만큼 엄마는 자신의 정성을 온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밥상에 쏟았다.

늘 빠지지 않았던 생선요리에 더해 아빠가 좋아하던 쌈 채소들도 기억에 남는데 쪄낸 호박잎과 양배추, 싱싱한 케일은 물론 다시마, 상추와 깻잎이 정갈하게 정돈된 원형 접시에 쌈을 위해 젓국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양념장은 저녁상을 돋보이게 했다. 큰 젓갈을 담근 항아리가 있는 작은 아파트가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었다. 독이 세 개쯤 있었는데 그 안엔 젓국, 간장, 된장이 있었다.

가끔 엄마는 큰 플라스틱 대야에 고추장을 직접 담그기도 했다. 숙성을 위해 담아놓은 고추장을 둔 방에 이틀 동안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고추장은 어린 내 입맛에도 너무 달콤했고, 잦지는 않았으나 한 번 앓으면 크게 병치레를 했던 내 입맛에 딱 맞아 나는 고추장과 작은 찬 만으로도 밥을 잘 먹었다. 그러고 나면 줄어든 몸무게가 어느새 회복이 됐다.

그 작은 방에서 엄마는 가끔 검은 천을 덮어 콩나물을 키우기도 했다. 지척인 슈퍼 앞에서도 콩나물을 팔건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 시간을 참 정성스럽고 치열하게 살아냈다.


여름이 되면 메뉴가 바뀌었다.

아빠는 엄마의 냉면을 너무나 좋아했고, 엄마는 여름의 초입 냉면 육수를 큰 대야에 많이 만들어 냈다. 고기 끓는 냄새가 나다가 나중엔 한약 달이는 것 같은 냄새가 연하게 났는데 그걸 식혀 기름을 걷어내는 일을 몇 시간 혹은 종일에 걸쳐했다. 아빠가 늦거나 엄마가 저녁에 성당을 갈 때면 삶은 면에 참기름을 발라 붇지 않도록 했는데 그럼 늦게 귀가한 아빠는 그걸 육수에 말아 맛있게 드시던 기억이 난다. 나는 식히기 위해 건져 찢어놓은 고기 고명을 야금야금 꺼내 먹기도 했다.


어느 여름, 무뚝뚝한 전형적인 부산 사람인 아빠가 엄마의 요리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팀 후배들을 우르르 끌고 집에 온 적이 있다. 그렇게 많은 면을 삶는 걸 처음 봤는데, 엄마에게도 처음인 그 일에 면은 조금 불었고 엄마는 손을 데이기도 했지만 이후 여름부터 아빠 회사팀의 '냉면 먹기' 방문은 연례행사가 되었고 한 후배는 자신의 부인을 데려와 엄마에게 냉면을 배우도록 했다. 힘든 일이지만 엄마는 내심 얼마나 행복했을까.

모든 손님이 돌아간 뒤, 남은 무절임과 고명에 엄마 아빠는 소주 한잔씩을 마시며 행복해 보였다.


나와 언니의 담임선생님들 식사 초대를 하거나, 친척들이 오면 상은 좀 더 화려해졌다.

쌈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 엄마는 쌈무를 가운데 놓고 여러 채소와 고기를 둘러놓아 싸 먹는 요리를 만들었다. 그 날의 모든 잔은 글라스 잔으로 바뀌었고 크리스탈 접시 위에 놓인 음식들은 돋보였다. 선생님들은 처음 보는 음식이라며 엄마의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맛있게 잘 드셨다. 유난히 맛있게 잘 드셨던 선생님 한 분은 체면치례를 하지 않고 엄마가 손에 들려주는 포장된 요리와 레시피까지 기분 좋게 들고 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절판'의 응용 버전인 쌈무 요리는 우리 집에만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던 형제인 아빠와 삼촌의 사이마저 잠깐 녹였던 그 마법 같은 메뉴에 빠진 삼촌은 형수에게 이 요리를 좀 배우라며 숙모를 채근하기도 했다. 쌈무를 비롯해서, 요즘은 흔하지만 당시엔 파인애플로 연육을 한 갈비찜은 생소하고도 귀했고 해파리냉채는 고급 음식이었다. 밥은 조와 찹쌀이 잘 배합된 윤기 있는 공깃밥이었고 어른들의 술잔엔 엄마가 담근 오디나 매실 원액이 조금 섞여 독특한 향을 풍겼다. 기억나는 손님상의 풍경과 분위기가 아직 내게 남아있는 걸 보면 먹고 자란 음식의 추억이란, 미각과 후각으로 기억되는 추억이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새삼 놀랍다.



예쁜 엄마, 능력 있는 엄마, 똑똑한 엄마.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직업이 있던 엄마는 말 그대로 슈퍼우먼처럼 자신을 태워 가족을 먹였다.




그런 엄마는 어느 날 세상에서 갑자기 영영 없어져버렸다.

피곤한 장례를 치르고 가는 길 집에 가서 엄마에게 계란 풀은 라면을 끓여달래야지,라고 생각했다가 아, 엄마 장례 치르고 오는 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각의 동물인 나는 같은 생각을 집에 오는 길에 몇 번이나 반복했다. 라면, 아 엄마 없구나 라면, 아 엄마 없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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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떠났다. 작스런 엄마의 죽음에 대해 참고, 참고, 참다가 대책 없이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대책이 없기에 돈도 없었다. 가이드북도 없이 루트를 벗어난 여행을 한참 했기에 예산은 계속 부족했고 치솟은 유로 환율은 가난한 여행자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우연히 도착한 폴란드의 아침은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했지만 마음이 가난하여 몸도 가난한 나는 작은 빵 수레에서 파는 300원에서 600원 정도 하는 빵을 사 먹기도 부담스러웠다. 가장 싼 호스텔에서 가장 싼 재료를 사서 이상한 요리를 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라쿠프의 한 호스텔에서 찬장을 열었다. 소금이나 있을까 해서 열어 본 참이었다.


마법인가?

플라스틱 소주팩과 납작한 캔 깻잎이 있었다. 한국인은 나밖에 없는 호스텔에 이름을 쓰지 않은 음식인 걸로 미루어 어느 여행자가 남긴 것이 분명했다. 한글로 이걸 먹어도 되냐는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지만 며칠 동안 답은 없었다. 그동안 나는 아우슈비츠를 다녀왔고, 행복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을 구경했다.


폴란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 소주와 깻잎을 먹었다. 감상적인 기분에 취해 소주를 마셨는데 비도 안 오던 그날은 달이 엄청난 만월이었다. 술 마시기 딱 좋은 날 내 앞에 나타난 소주와 깻잎. 몇 달만의 한식.

영어를 할 줄 몰랐기에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 지 한 달이 넘었고, 몸의 가난에 더해 비참하도록 가난해진 영혼까지 소주가 촉촉이 적셔주는 느낌이었다. 남은 쌀을 들고 다니기 무거울 것 같아 밥 없이 먹었던 깻잎의 짠맛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 장을 여러 조각으로 조각조각 내어 아껴 먹었다. 매콤, 달콤, 약간의 젓갈 맛 까지 느껴지던 그 작은 깻잎 조각들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던 양념 소스까지 환상적이었다.


수통 모양의 작은 플라스틱 소주 한 병과 깻잎 캔 하나로 적잖이 위로가 되었던 밤이었다. 몹시도 비틀거려 넘어질 것 같이 위태롭던 100일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어 묘하다.


그렇게 긴 여행 후 나는 떠도는 것에 중독된 듯 여행을 하느라 한참 늦은 졸업을 했고, 남들처럼 취업난에 허덕였지만 면접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의 여행 이력을 눈여겨본 한 팀장에 의해 첫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혼자 이렇게 여행을 다녔다면 밥이라도 혼자 시켜먹을 줄 알지 않겠냐는 것이 채용의 이유였다. 나는 해외 프로젝트에 배정되어 외국 손님 의전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한국의 문화는 물론 끼니때마다 한식에 대해 설명을 하는 일은 거의 매일 있는 일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일수록 음식의 재료부터 궁금해했고, 특정 종교를 가진 고객에게는 특별한 메뉴가 필요했다. 식사 메뉴와 장소를 선정하는 것은 업무의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업을 해야 할 때, 민감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분위기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식사를 하는 거니까.


나는 정성 들여 음식과 맛에 대해 설명다. 실제 쓰이는 영어의 대부분은 영어 한 마디 할 수 없던 첫 번째 여행 때 생존으로 익힌 단어들이었고, 고급 음식점에서 나오는 찬들과 요리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철마다, 혹은 이벤트마다 엄마가 해 주었던 음식들과 비슷했다. 이렇게 집밥에 대한 기억은 손님과의 유연한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내 직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첫 직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밥 먹는 노동을 이어오고 있다.


내게 집밥에 대한 기억은 짧지만 강렬하고, 한식은 내 삶과 직업의 일부분이 되었다. 나는 며칠 후에도 싱가포르에서 온 손님에게 감자탕에 대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떠도는 여행을 하는 동안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에서 했던 아르바이트는 민박집에서 밥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점차 어른들이 말하는 음식에 대한 미신같은 말들을 믿게 되었다. 손맛의 유전이라던가 인생의 유사함 같은것들 말이다.


20대 후반을 지나면서 입맛이 바뀌어 나는 꼬릿 하고 물컹한 음식들을 비롯해 입에 대지도 않던 음식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젓갈이나 가지, 아귀찜 같은 것들. 모두 나의 부모가 즐겨 찾던 음식들이다.



바깥은 비가 내리고, 오늘 나의 일과는 끝났다. 동태탕에 소주 한잔을 위해 집을 나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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