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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ul 25. 2019

반백수의 삶

결핍에 대한 고백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을 읽는다. 대중 강연이라 쉽게 술술 읽힌다. 그러다 몇 번째 파트에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나를 건드리는 단어에 생각이 많아지는 탓이다. 결핍에 대한 문장들.


나의 결핍은 무엇인지 솔직히 생각해 본다.


낮은 자존감, 매력 없음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매우 상대적인 성질을 가진 가치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여전히 나를 옭아맨다. 나는 록산 게이, 200kg이 넘는 그녀의 책 '헝거'를 읽으며 공감한다. 그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몸무게를 가진 내가, 그녀가 타인으로 인해 겪는 수치와 고통을 생생히 공감한다. 강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의 편협한 '인식'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그건 그것일 뿐 나는 강박 속에 산다. 정체를 앎으로서 전보다 옅어졌다 해도 여전히 나의 하루하루와 순간순간은 강박과의 연속적인 싸움이다. 이걸 먹으면 살이 찌겠지, 하는 사소한 생각부터 먹고 싶지 않지만 먹는 습관, 허기지지 않아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입에 넣는 습관, 대식을 자랑처럼 여기는 버릇, 그러면서도 작아진 옷들을 보려 하지 않는 나약함, 습관적으로 마시는 술, 술만 먹으면 나오는 그놈의 늘어난 15kg 타령에 더해 몇 년 전 사진을 보여주는 추태. 나 원래 이랬어, 지금처럼 이러지 않았어, 그러니 나 다시 한번 봐주겠어요? 같은 발버둥 같은 행동들.


또 다른 결핍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간과 자원의 결핍.

늘 항공권을 검색하고 떠날 곳만을 생각했던 걍팍했던 생활은 백수라는 기간을 거치면서, 공식적 백수생활 청산 후에도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쓸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서 느슨해졌다. 확연하게 느끼는 것은 여행에 대한 충동이 확실히 이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를 어찌할 바 모를 정도로 떠나고 싶게 내면을 충동질했던 여행에 대한 욕망은 현실로부터의 휴식보다, 도피에 대한 희망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더불어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조건이 성립하면서 시간에 대한 결핍이 줄어들자 신기할 정도로 떠나고자 하는 마음도 옅어지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 주는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해야 할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집에서 밥을 지어먹는다. 맛있는 걸 배달 해 먹었고 필요한 걸 최소한으로 산다. 최소한의 얽매이는 삶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내 월급은 온전히 나를 위해 쓰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온전히 나를 위해 쓴다. 자고 싶으면 자고 밤을 새기도 했지만 바뀌었던 낮밤도 이내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루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진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 앞에 뭘 해야 할지 몰라 혼자 빈둥거리는 방황의 시기도 있었지만 그 빈둥거림 마저 좋았으며 느껴지는 지루함조차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전 직장생활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사람 사이에서 고통받았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빠져나와 나는 내생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 복된 시간을 누리고 누린다.


이렇게 힘을 얻고 용기 내어 이제, 또 다른 결핍을 대면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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