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은 조용한 거울 속의 세상도, 왼손잡이의 자신도 보았다지만, 나는 겨우 고개를 드는 것도 어려워 어쩌다 용기 내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나의 내면을 직시한다.
가장 먼저 보이는 나의 민낯은 비겁하고 용기가 없다.
다가오는 고난에 어찌할 줄 모르다 그냥 피하는 겁쟁이가 된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겠지.
그런 내게 한낱 위로는 내가 비겁한 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
밤낮이 가끔 바뀔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반 백수 삶이 가져다주는 바이오리듬 파괴다.
불면증도 심하게 앓았던 터라 수면 패턴이 바뀌면 걷잡을 수 없다. 기절 직전까지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난 뒤 곤한 잠에 빠진다.
어느 새벽, 잠이 안 와 그날도 24시간을 보낸 뒤, 다시 9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던 날이 있었다. 33시간 만의 수면. 아침 여섯 시쯤 잠이 들었는데, 자다 꺼진 에어컨에 폭염경보가 더해진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서 9시간을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심지어 불편한 자세로 자다 일어났다.
살다 아주 가끔 그런 날 있지 않나, 내가 꿈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꿈을 조종하는 것 까지 가능한 것 같은 그런 꿈을 꾸는 날. 대게 행복한 기분의 꿈을 꿀 때 말이다. 그날 역시 인생에 아주 가끔 겪는 그런 일을 겪은 날이었다. 내가 꿈의 컨트롤러가 된 듯 꿈이 아주 연속적으로 이어졌는데, 그 와중에도 꿈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깨고 나서 한참을 가만- 히 있었다. 그리곤 그 기억이 행여나 휘발될까 너무나 아까운 마음이 들어 바로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꿈의 단편 이나마 기록 해 두었다.
1. 강신주가 (그 강신주 맞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철학자라 쓰고 Ex 짝남이라 읽는다) 꿈에 나왔다.
2. 내가 사는 지역 근처 강의를 왔는데, 주최 측과 이례적으로 뒤풀이를 가는 것이었다. 왜인지 내가 그 뒤풀이 장소에 같이 참석하고 있었다.
3. 내가 숙소까지 배웅을 해줬다. 근데 분위기가 몹시 꽁냥 거리는 분위기였고, 숙소까지 같이 들어가게 됐다.
4. 옷 중에 빈티지스러워서 잘 입고 다니는 편한 반팔티가 있어서 항상 여행지에도 가져가는데 (주로 잠옷으로 입음, 별생각 없이 잘 입던 중 발리에서 만난 친구가 "너 교회 다니니?"라고 해서 왜 하고 물어보니 걸려있던 그 티셔츠에 "Jejus will love you"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었다 젠장. 민망하긴 한데 너무 웃겨서 한참 자지러졌던 적이 있다. 무튼 것도 모르고 한참 잘 입고 돌아다녔는데) 꿈속에서 내가 그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박사님이 비슷한 티를 입고 있었다. 그 꿈에선 '나'가 아니라 '우리' 같은 분위기였고, 저 위의 이야길 해줬더니 그게 뭐가 웃긴 이야기라고 막 시작한 연인들처럼 까르르 웃어제꼈다. 이야기가 웃겨서, 비슷한 티셔츠를 입은 게 신기해서, 혹은 내용도 기억 안나는 이야기들을 서로 하면서.
깔깔대면서 소파에서 뒹굴뒹굴 거렸는데 그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 나도 너무 행복했다. 그 미소 말이다. 시니컬하거나 억지로 'ㅎㅎ' 하는 그 티비용 미소 말고 강연장에서 보이는 가끔 보이는 그 진짜미소를 보이면서 말이다.
꿈의 분위기와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행복해서, 깨고 나서도 아주아주 여운이 찐- 하게 남는 꿈이었다.
깨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이게 정말 꿈인가, 꿈이란 말인가. Aㅏ..........................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났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아주 옛날 공연 관련된 알바를 하다 보니 그때 공연 무대에 섰던 배우들이 요즘 티브이에 나오고, 어떤 배우는 주 조연급으로 나오기도 한다. 잘된 이들을 보니 신기한 마음이 들고 반갑기도 하다. 나는 정동화라는 뮤지컬 배우의 팬이었는데 그 배우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매력적인 배우가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다. 바로 감방생활 헤롱씨. 외에도 몇몇 얼굴들을 보면 반갑고 신기하고 또 잘됐다 싶고 그렇다. 아무튼, 그들을 보면서도 나는 와 신기하고 잘됐다 정도였지 뭐 아는 척을 굉장히 하고 싶다거나 팬으로서 나만 알던 배우를 뺏긴 것 같다는 그런 느낌조차 없었다. 그런 나를 뒤흔든 대중매체 스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강신주 박사님이었던 것이다. 나와 나이 차이는 물론 직업 환경도, 인생의 스펙트럼도 너무 달라 접점이라곤 전혀 없을듯한 저 멀리 있는 사람.
처음 그의 글을 읽고, 티브이에서 보고 책을 볼 때만 해도 실은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책은 잘 팔릴 줄 알았으나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강연에도 소위 '잘 팔리는' 인기쟁이가 될 줄이야.. 그리고 그의 팬이 이렇게나 많았고 또 많아질 줄이야.
나는 그의 대중 마케팅 전략이라는 거미줄에 걸려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마음만 끓이다 마그마가 되어서 활활 타 죽을 것 같다.
바라볼 수 없는 여우의 신포도 같은 존재에게 비겁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조건 피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할 만큼 해 보았다. 편지, 선물, 이메일 등등.. 그러나 아무런 회신도 얻지 못했던 나는 어쩌면 내 욕심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 그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상대가 내 편지나 마음 표현으로 기쁘면 그만이고 더 관심이 있으면 연락이 왔을 것이며 아니면 어쩔 수 없다,라고.
머리로는 쿨하게 생각했으나 어찌 사람 맘이 뜻대로 되더란 말인가. 집필실을 수소문 해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강연을 보고 관뒀다. 그 강연에서 어느 아주머니 한분께서, 그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강연장을 약간의 대환장파티로 만들고 그가 애써 수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에게 나와 그 아주머니가 뭐가 다르겠나 싶기도 하고. (심지어 그날 싸인을 해주면서 한 달 전 나에게 이메일을 알려줬다는 사실을 전혀 잊어버린 듯 첨 보는 사람 대하듯이 했다.. 혼자 상처받음)
이후 최대한 회피 전략을 쓰며 집에 있는 그의 책은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모아 온 포스터들은 베란다로 치워놓았으며 티비도 예능과 드라마에만 채널 고정해놨다. 그렇게 평온하던 어느 날, 티브이를 켰는데 3부작이라며 그분이 나와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도서관에는 이번 달 근처에서 열리는 그의 강연 베너가 떡 하니 서있었다. 일부러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생활 반경을 좀 바꿀 요량으로 수영장에 등록했다. 수영장에도 같은 베너가 서있었다. 유명인을 맘에 둔다는 건 그리고 또 잊는다는건 얄궃다. 못된 운명처럼 가끔은 도망갈 곳도 없다.
다시 해외 방랑을 해야 하나.......? 그만큼 그에 대한 마음 정리가 안된 거다. 이놈의 미련.
요즘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 '호텔 델 루나'를 보며 주인 장만월의 '벌'을 생각한다. 한 나무에 운명이 붙박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이라는 벌, 어떤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붙박여 벌을 받는것이 나의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외로움이 벌이라면, 나는 그 벌에 너무나 공감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뜨거운 사람인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진할 수 있는지, 이토록 절절하게 내 존재조차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혼자 마음을 끙끙 댈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가 낯설도록 몰랐던 것이다.
팬서비스나 나쁘던가. 어떨 땐 기억도 해주고 이야기까지 나누니 (무려 포옹도 했다!! 한손 아니고 두 팔로 딥하게ㅋㅋ 어쩌다 보니 커피도 같이 마심) 희망고문은 아니라도 혼자 소중히 기억하고 간직할만한 추억이 있어더 놓기 어려웠다. 자칭 위대한 철학자라는 그는 더욱더 커지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더욱더 넘사벽이 되어가는 상대방을 보며 허탈함 보다 어찌할 수 없어뭉그러진 마음이 애달프다.
혼자 가난한 철학자의 아내가 될 결심까지 했었는데.. 아 손자의 손자 이름까지 하..(생략)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걸까? 아님 친일 앞잡이 정도 됐었나.. 하.... 술 끊었는데...........ㅠㅠ
글을 쓰다 보니 술 생각이 간절하다. 날 이렇게 애달프게 한 사람은 중2 첫사랑 오빠 이후 첨이다..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