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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식당 by 안주인 Oct 28. 2017

경북 안동 | 월영교 & 병산서원

감탄이 터져오는 액자, 그 이름은 '만대루'

<알쓸신잡2>가 시작되었다. 시즌1이 끝나고 나서 유홍준 교수님과 더불어 건축가 승효상님이 나오면 오지고지리고 허니꿀잼이겠다고 바랬었건만! 바람이 완연히 이뤄지진 않았지만 어쨌건 시즌2가 만들어졌고 건축가 유현준님이 등장하셔서 바라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신난다.


금요일 저녁만 오매불망 기다리게 만드는 이 예능은 안동에서 첫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스물 둘이 되던 겨울에 친구들과 처음 갔던 안동. 1박 2일 여행의 밤에 월영교 중앙 정자에서 불꽃 놀이를 보는 행운을 가졌던 여행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 프린트해서 준비해간 여행지 정보를 들고 하회마을, 봉정사, 도산서원, 육사문학관까지 살뜰히도 탐색했던 도시. 안동 중에서도 '정말 좋았어!'하는 기억으로 신랑 손 잡고 월영교와 병산서원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 해 여름이었다.




월영교 (月映橋)


더위가 푹푹 찌던 그 날. 스물 둘의 겨울에는 불꽃 아래 서 있었던 월영교. 10년 만에 여름날 다시 보니 더위 쫓느라 사방으로 물을 뿜고 있었다. 달그림자 찾는 밤의 모습이 훨씬 멋있기는 하지만, 다시 와 보았다는 감상에 젖어 충분히 반가웠다. <알쓸신잡2>에서 전형적인 아저씨들 기념사진 처음으로 찍는데가 바로 여기잖아. 


지식백과 뒤져 본 정보에 의하면2003년 개통된 월영교는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라 한다. 다리 한 가운데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월영정(). 월영교는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숭고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는 것이다. '미투리'의 형상이 바로 보이는 것은 아니나, 전래 된 이야기 덕에 다시금 낭만적인 조형물로 보여진다.




병산서원 (屛山書院)


여행자를 위한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리패키지 경상권 책을 들고 떠난 여행이었다. 유홍준 교수는 병산서원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길게 적어두었다. 그 애정을 짐작할만한 대목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병산서원은 하외 입구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10리 남짓 걸어가면 나온다. 지금도 시골 버스, 경운기나 다니는 비포장 흙길이어서 그것이 병산서원 보존의 큰 비결이었는데, 슬프게도 이 비책 아닌 비책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갈 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 원림적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찌는 더위를 쉬이 가누지 못했던 우리는 물론, 차를 타고 들어섰다. 차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그 비탈의 길에 들어서 이대로 가면 뭐가 나오긴 할까? 차 없이 다니던 스물 둘의 겨울 여행 중에는 어떻게 왔던가? 미스터리 같은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도한 병산서원의 입구. 절정에 달한 더위 만큼이나 물이 오른 푸릇 잔디와 산천의 기운이 파아란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또 배롱나무가 풍경에 색채감을 더하는 계절이었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걸어서 당도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유홍준 교수님의 뜻과 의지에는 미치지 못하였겠지만, 멀미가 날 것 같은 비탈의 길을 훑고 '마침내' 마주한 모습은 그 역사적 의미를 뒤로하고라도 정말 멋졌다. 문외한인 우리의 감상이 이러한데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아는 분의 감상은 오죽할까.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 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3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 존덕사(尊德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건재한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그런 인문학적, 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그것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 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룸다움에서도 최고이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부/경북 순례 중.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에서 비롯한 복례문(復禮門)이 병산서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이다. 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자에 대한 가르침을 그대로 함의하고 있는 현판이다. 공간에 의미를 달아두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



복례문을 지나면, 바로 만대루(晩對樓)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는 의미를 더듬어 보면 '늦을 녘 마주대할만한 누각'이 된다.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만대루의 진가는 서원안으로 들어와 아래로 내려다 보거나, 그 곳에 올라 병산서원을 둘러싼 낙동강과 병산을 둘러싼 풍경을 볼 때 드러난다. 긴 긴 세월을 다 겪어낸 나무의 결, 그 나무가 프레임이 되어 담는 풍경, 풍경을 다 끌어안은 고요함은 시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만 같은 평화를 느끼게 한다. '앓음다움'이란 어원을 가졌다는 '아름답다'는 말은 분명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풍경을 누빈 시간을 기념하며 만대루에 기대어 서른 둘의 기념사진. 겨울과 여름을 풍경을 보았으니 다음에 보게 될 병산서원이 품은 계절은 가을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무엇보다 지극정성으로 고사를 지키는 류시석 아저씨의 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서애의 후손으로 풍산 류씨에 인물 많음은 세상이 다 알지만 문화유산 보호에 있어 시 자 석 자 아저씨 같은 분은 병산서원만큼이나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분이다.

서원집에 민박하면 아저씨는 밤늦도록 만대루에 앉아 달을 희롱하는 것을 허락해주시고, 강변에 나가 모닥불을 피우도록 장작을 마련해주시기도 한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다음 번엔 류시석 아저씨의 노고에 감사하며 서원집에 민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건만,
<알쓸신잡2> 방송을 탔으니 한 동안은 너무 북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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