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 놓고 싶은, 가을의 절경
가을이 깊으니 생각난다. 작년에 우리가 발견한, 억소리나게 좋았던 서울 근교 여행지. 신혼 2년간 서울을 주거지로 두고 주말마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올해 봄에 사고 나서 지금은 처분하고 없지만 '복붕이'라 불렀던 2014년형 쉐보레 스파크, 우리 첫 차는 26개월간 8만km 가까이 뛰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당일이나 1박 2일 코스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면 안가본 데가 거의 없지 싶다. 그런 우리에게도 낯설었던 이름 '연천'.
여행의 출발은 이러했다. 아울렛 쇼핑을 하고서 *안젤로니아 축제 무료 입장권을 사은품으로 받았다. '천사의 얼굴'이라는 꽃말을 가진 청초한 꽃이 만발한 사진. 그것은 라벤더가 피어난 보라의 땅, 훗카이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처럼 보였다. 그래서 혹 했다.
가보자 싶어서 검색왕 신랑 Jamie가 엄지에 불나도록 연천 탐구에 돌입했다. 기간상 축제는 끝물이었지만 (그러니 무료 입장권을 풀었겠지?) 가을 명소로 꼽히는 '재인폭포'를 발견한 것은 운명이었지. 내 이름은 Jane. '제인'이 아니라 꼭 '재인'이라고 불리우고 싶어 지은 이름이니까. 그렇게 #허브빌리지 그리고 #재인폭포 2개의 목적지를 향해서 떠났다.
볕 좋은 가을날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르는 입구부터 '잘 조성된' 문명의 관광지처럼 여겨졌다. 해외 여행을 할 때는 '관광객 필수코스' 책자에 꼽힌 장소들을 놓칠세라 잘도 찾아 다니면서, 국내 여행 중에는 '관광지'라는 단어에 참 너그럽지 못하다. 보란듯이 가꾸어져 뽐내는 장소에는 어쩐지 발길을 두기 껄끄럽단 말이지. 특히나 오감 발달을 위한 자극이 필요한 아이도 없고, 사랑의 증거로 '인증샷' 남길 필요도 없는 늙다리 신혼부부는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다. 어쨌든 공짜표가 생겼다는 핑계로 호사를 누려보니, 호오- 나쁘지 않은데? 싶었다.
결론적으로 <허브빌리지>는 가 볼만한 곳이었다. 깨끗하게 잘 조성된 시설도 그렇지만, 다양한 허브들과 함께 자연풍경을 끌어안고 있는 곳이라 좋았다. 식물만큼 계절의 얼굴을 잘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더군다나 *허브라 함은 '예로부터 약이나 향료로 써 온 식물'이란 뜻이라니 계절의 향기를 느끼기에도 더할 나위 없겠다 싶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보라빛 안젤로니아가 끝물이었다. 사진으로는 바싹 마른 나뭇가지만 남은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 계절을 다 살고 쪼그라드는 모양으로 보라빛이 어른거렸다. 안젤로니아 사이로 천일홍도 간간히 보였는데, 보라빛이 생생한 계절에 다시 한 번 이 풍경을 보고 싶었다. 물론 시리게 새파아란 하늘에 한적한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이 계절이 좋았겠지. 보라의 꽃만큼 많은 사람들이 들썩일지 모를 일이다.
영어 이름을 Jane으로 쓰기로 마음 먹었다.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다. 한글 표기를 보통 '제인'으로 하지만, '재인'으로 하겠다고 선포하며 내 이름으로 삼았다. 빨강머리 앤이 자신의 이름 이니셜은 끝에 꼭 'e'를 붙여야 한다고 고집했던 뉘앙스와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내 이름의 이미지라는게 있으니까.
연천에 '재인 폭포'가 있다는 것은 *칵테일 파티 효과와 같았다. 오, 딱 나를 위한 곳이잖아!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는 파티의 참석자들이 시끄러운 주변 소음이 있는 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자와의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집중하여 잘 받아들이는 현상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와 같이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또는 ‘선택적 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선택적 지각이나 주의가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자기 관련 효과(self-referential effect)’, ‘연회장 효과, 잔치집 효과’라고도 한다.
- 출처 | 위키피디아
재인 폭포는 가을의 명소라고 불리운다. 진입로의 가을 풍광도 그렇지만 도착해서 내려다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서울에서 불과 몇 시간 달려 도착한 곳인데 비현실적이었다. '갑자기' 펼쳐지는 탓에 더욱 그런 기분이 든다. 절벽의 위로 얹어진 가을 단풍은 어느 훌륭한 조경가가 구성한 것처럼 빨강, 노랑, 초록의 어울림이 감탄을 자아냈고, 폭포 아래의 웅덩이는 옥빛으로 맑다. 아찔한 계단을 후들후들 떨며 오르내렸지만 이렇게 멋진 여행지를 찾아내다니! 감탄해마지 않았다. 너무 유명해지지마. 또 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