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엔, 새하얀 케이크
편의점부터 백화점까지 초콜릿 대란이 일어나는 시기다. '발렌타인데이'의 기원(http://ppss.kr/archives/17578)이 어쨌건간에, 한국에서는 '매년 2월 14일,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을 주며 마음을 표현하는 날'로 자리잡은 듯 하다. 초콜릿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크리스마스에 연인이 선물 주고 받는 것만큼이나 동요되고 싶지 않은 상업적 풍조로 여겨진달까. 청개구리 마음이 드는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시끌벅적한 연인을 위한 스페셜데이가 아쉬웠던 몇 년 전에 나는 통크게, "앞으로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 말고, '초콜릿색' 고기를 먹는 날로 하자!"고 선언했다. 고기 좋아하는 당신이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초콜릿색 고기라하면, '소고기'이다. 소고기하면? 마장동이지. '마장동 소고기'는 합성어지만 마치 일반명사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전통과 역사가 오래되었을 마장동 우시장은 '한우가 삼겹살보다 싸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질좋고 맛있는 소고기 거래가 가능한 축산물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가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색 고기를 먹기로 선언한 해였던가, 좀 지나고였던가. 소고기를 먹으러 작정하고 찾아갔던 마장동. 부위별로 조금씩 다른 맛을 음미하고 서비스로 주신 육회까지! 발렌타인데이는 초콜릿색 소고기 먹는날임에 방점을 찍는 경험이었다.
발렌타인데이에 소고기 먹기로 한 약속은 특별한 날 별스런 선물 대신 진짜 먹고싶은 걸 먹자!라는 우리다운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언젠가의 당신 생일, 소고기 그 중에서도 고급짐의 상징, 등심과 안심을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티본 스테이크, 그 중에서도 시간의 풍미를 덧입힌 드라이에이징으로 거나하게 먹었다.
이 때 먹은 초콜릿색 고기가 아직까지는 나의 인생고기로 등재되어있다. 꼬릿꼬릿한 치즈맛이 나던 풍미! 한 덩이에서 다채롭게 느껴지는 맛의 향연! 좋았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동네 정육식당이었는데, ‘고기의 질’과 ‘동네식당 이미지’가 상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컨셉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던 기억.
가성비로 치면, 집에서 먹는 것이 최고다. 신혼집이 생기고 #우리집작은부엌 안에서 참 많은 요리가 탄생했다. 오븐 처음 가동시키던 그 때에는 ‘고깃덩어리’가 통째로 제법 자주 등장했다. (물론, 지금은 먹을 사람이 없어서, 예열하고 치우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등의 갖은 이유로 오븐은 겨울잠 자듯 존재한다.) 로스트 치킨, 로스트 포크, 로스트 비프. 그 중에서도 초콜릿색 고깃덩이를 살살 저미면 빨간 육즙 머금은 속살이 보이는 비쥬얼은 로스트 비프가 최고였다.
팬프라잉 스테이크도 여느 레스토랑 부럽잖게 차려내곤 하는데, 특히 친정 아빠가 무지 좋아하신다. 향긋한 허브와 적절한 간으로 마리네이드 된 고기를 센 불에서 시어링(*searing; 고기 표면을 태우듯이 구워 크러스트한 질감을 만드는 조리 방식)하여 육즙을 속에 가둬 굽고, 때마다 삘 받는대로 가니쉬(*garnish; 곁들여 내는 채소 등)와 소스를 둘러 차려내면 맛은 물론 보기에도 그럴싸하다.
또 언젠가는 야심차게 고깃덩어리를 직접 썰어서 먹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구운 고기를 칼질 할 때도 그렇지만 고깃결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식감이 달라진단다. 그래서 삼각살 한 덩이가 한 점 한 점 슬라이스되어 식탁에 오르던 때도 있었고.
여행 중에도 초콜릿색 고기 먹기는 특별한 순간, 이벤트로 벌어진다. <원나잇 푸드트립> 방콕편에 등장하여 우리의 도전욕을 잔뜩 자극했던 ‘ARNO’S’ 레스토랑은 2주년 결혼기념일 저녁의 근사한 저녁 식사 장소였다. 근사했다고 기록하기엔 너무 게걸스럽게 먹은 것은 비밀이다.
터키 3개의 도시를 이동하며 다닌 신혼여행 중에도 몇 번 초콜릿색 고기를 찾았다. 이슬람 국가답게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 소고기와 양고기가 육고기의 주류였다.
그래서 올해는? 이걸로 퉁치자하면 입이 댓발로 튀어나와 아쉬워하시겠지만, 주말에 소고기 샤브샤브해서 월남쌈을 잔뜩 먹었다. 부드러운 아보카도랑 아삭이는 채소를 잔뜩 넣으니 분명 고기를 한 냄비 먹었는데도 살이 찌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피시소스로 적당히 간을 맞춘 국물에 쌀국수 말아 먹는 피날레는 진리다.
고기 먹은 이야기를 이렇게 몰아서 펼치자니, 착한 눈을 가진 세상에 모든 소들에게 미안하다. 초콜릿색도 그들의 피에 든 헤모글로빈이 가열되어 만들어진 색일텐데. 그렇다고 채식주의자 선언을 하지도 못할테니까, 즐거운 이야기를 껴안은 ‘특별한 날’에만 먹기로 한다. 지구와 우리 몸과 내 지갑을 위하여! 그뤠잇?
*참,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색 고기에 응하는 화이트데이 우리 부부의 이벤트는 사탕 아니고 새하얀 케이크입니다.고기 사주기만 하긴 억울해서 만든 룰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