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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하 Sep 24. 2024

홍시



“홍시, 난 홍시를 먹을래.”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는 TV 속 진행자의 질문에 나는 단번에 생각해 냈다. 그러고는 빨갛고 고운 홍시를 떠올리며 스르르 미소를 지었다. 평양냉면에 불고기를 먹고 싶다는 사람, 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사람, 엄마가 만들어준 고기완자가 먹고 싶다는 사람. 그래 그것들도 참 맛있지. 공감은 되었지만 나는 변함없이 홍시였다. 죽을 날을 떠올려서인가,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코 끝이 찌릿하고 가슴속에서 열기가 스윽 올라왔다 내려갔다. 슬프다기보다는 감동적인. 엄마가 떠올랐다.

“홍시가 그렇게 당기더라.” 엄마는 뱃속에 나를 가졌을 때 홍시를 많이 드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홍시를 좋아한다. 아니면 내가 홍시를 좋아해서 홍시를 당기게 한 걸까.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말한 어린 장금이를 존중한다. 중요한 건 홍시는 나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을 음식이라는 것.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허전한, 요리되지 않은 날 것의, 그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 그런데 나에겐 그 홍시가 어떤 다른 음식보다도 정성 가득하다.

홍시는 오직 달콤하다. 사과나 귤처럼 신맛과 단맛이 섞여 있지 않고 달달하기만 해 칭찬만 해주는 선생님 같다. 게다가 알 수 없는 감칠맛과 호로로 입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식감이 폭신하고 아늑한 1인용 소파같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단맛이 나는 다른 과일이 아니라 꼭 홍시여야만 하는 이유는 그 알 수 없는 감칠맛 때문인 것 같다. 제철을 맞은 홍시를 음미하며 그 감칠맛은 감의 떫은맛이 깊이 성숙되어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다. 보통 ‘슈퍼’라고 부르는 어느 동네나 있는 그런 작은 가게. 아빠는 자주 집에 안 계셨기 때문에, 엄마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셨다. 그리고 집안일도 동시에 해내셨다.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 일을 봐야 할 때는 언니나 내가 가게를 잠시 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나는 참 바지런하지 못하다. 대학생 때 용돈을 벌어보겠다며 한 PC방 일은 몸살이 나서 한 달 만에 그만두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잘린 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언니와 나에게 궂은일은 시키지 않으셨다. 무거운 박스를 나르거나, 물건을 정리하거나 하는 것들. 보통 하는 일은 손님이 오면 나가보고 계산하는 일뿐이었다. 나는 엄마를 꽤 많이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도운 일은 가게 일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빠 없이 자란 티 난다고 할까 봐, 우리 애들한테 궂은일 하나 안 시켰어.” 어느 날 이웃 아주머니와 엄마가 나누던 대화를 들으며 아직 얼마만큼인지도 모르겠는 엄마의 고생을, 나는 그 한 문장으로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말이 조금씩 더 깊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두 딸에게 달콤한 것만 주기 위해 엄마는 그 긴 떫은 시간을 기꺼이 삼켜 왔구나. 서서히 감칠맛의 정체를 알아간다.

톡 하면 터져버리는 풍만하고도 가녀린 홍시는 순수하게 단맛만 간직한 채 용케도 내 손 위에 도착한다. 고맙고 미안하다. 날숨에 미안하고 들숨에 다 먹어버린다. 날숨에 고맙고 들숨에 아쉽다. 아등바등 두 딸을 키워내느라 워커홀릭이 되어버린 엄마를 보며 송구스럽다 생각하면서도 엄마의 떫은 시간의 결과를, 등록금을, 어학연수 비용을, 각종 반찬을 홀랑 먹어버린다. 그 감칠맛 나는 달콤함에 정말 감사하다 되뇌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의 다음 김장김치 택배를 기다린다. 

돈이나 귀중한 물건은 죽어서는 가져갈 수 없지만, 아름다운 기억은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다고. 여행과 사진을 사랑하는 어학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다. 나의 영혼이 떠나기 전, 오랫동안 함께했던 이 육체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싶은 선물. 육체가 떠나려는 영혼에게 챙겨 가라고 쥐어 줄 단 하나의 기억. 무한히도 사랑받았다는 증거. 잘 익은 홍시를 두 손 위에 올려놓고 나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 본다. 죽기 전까지도 이 가여운 홍시를 호로로 먹어버리겠구나 나는. 끝에서 X번째 날, 염치 불고하고 또 한 번 엄마의 사랑을 음미하며 달콤한 기억만 야금야금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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