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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하 Dec 12. 2024

서른넷, 숙련된 지구인


이제야 이 지구에 조금 익숙해 지는 것 같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벌레가 너무나 끔찍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인지 이제는 예전만큼 벌레가 끔찍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여전히 가까이하고 싶진 않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어려웠고, 어쩔 줄 모르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운동을 하러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 날씨가 춥다며 스몰토크를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술술 받아쳤다. 이런 나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질 만큼 서서히 지구에서의 삶에 적응하게 됐나보다.

징그럽고 잔인한 장면을 보는 일도 여전히 힘들지만 예전만큼 크게 후유증이 남지 않게 되었고, 머피의 법칙처럼 사소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짜증 나는 일들도 이젠 '오늘은 그냥 이런 날이구나' 하게 된다. 누군가의 어이없는 실수로 귀찮은 일이 생겨도 '저 사람도 그냥 이런 날을 겪고 있을 뿐'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20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크게 키워가곤 했다. 내가 전한 말과 행동이 그들과 더 가까워지는데 또는 그들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주길 바랐다. 그러다가 혼자 실망하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있다'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고, 원래 그런 것이니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 오히려 그런 그들이기에 내가 더 넓어질 수 있다.

나의 성향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 성향에 맞는 것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면서 시행착오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들이 있었기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뻔했던 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행착오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점점 더 감정의 날뜀이 줄어드니 어쩌면 인생이 너무 밋밋하고 건조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엔 다른 것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요즘은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을 하곤 한다. 회사 근처에 마땅히 산책할 만한 곳이 없어 공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그 아파트 단지를 발견한 것이다. 단지 내 조경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잘 갖추어져 있어 슬렁슬렁 걷기에 좋다. 걷다가 문득 마음에 드는 나무를 발견하고 깊게 숨을 마셔본다. 내 몸속 안에 무언가가 녹고 있는 것인지, 산뜻한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숨을 마시는 게 아니라 자연의 숨에 내가 스며드는 것 같다.

숙련된다는 것은 스며드는 일인 것 같다. 이 지구를 이루는 자연과 사람들에 스며들어 나와 너를 덜 구분 짓게 되는. 어느덧 꽤 련된 지구인이 되고 있음을 상기함과 동시에 지구가 꽤나 불편했던 나를 추억한다. 얼마 전 내린 눈에 많이도 놀랐을, 여전히 연두빛인 은행나무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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