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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Jul 29. 2020

" 아빠, 저 지영이에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 아빠, 내 이름이 모야?"

".........몰라......"

" 1번 안소영, 2번 안은영, 3번 안지영, 4번 안.."

" 3번 안지영! 알지! "

아빠에게 내 이름을 물으면 한참을 당황하시며 생각하다 미안한 얼굴로 모른다고 대답하신다.

그러다 객관식으로 이름을 불러주면 내 이름 석 자가 나오자마자 고르시고는 당당해하신다.

아빠가 치매 판정받으신 건 거의 10년 정도 되어가나 보다.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술 마시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스트레스받지 마라.. 등등 많은 예방 수칙이 있지만 나는 우리 아빠를 보고 복불복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하루에도 한 시간씩 걷고 뛰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술은 입에도 못 대신다. 나이에 맞지 않게 긍정적이면서 어찌나 유머러스 하신지 나는 그런 아빠가 너무 좋았다. 내 성격이 아빠를 닮아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태어나길 아빠의 성격을 닮았고 자라면서 아빠로 인해 내가 더 나다워졌다.

항상 딸을 믿어 주고 응원하며 잠깐 헤매고 있을 때도 작은 한마디로 힌트를 주시는 분이었다.


회사에서도 아빠의 딸바보는 유명했다. 첫 월급을 탄 날 아빠는 떡을 해서 회사로 가져오셨다. 매일 지하철 역까지 새벽마다 데려다주시고 회식이나 친구들 모임으로 늦는 날에도 꼭 데리러 오셨다.

아빠의 한결같은 수고스러움을 나 또한 내 자식에게 똑같이 해 줄 거라며 당연시 생각했었다. 근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자식이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29살 어느 날 유학 간다며 들이 미는 학교 입학원서를 보고 엄마는 쓰러지셨다. 아빠도 적지 않게 놀라셨겠지만 나를 믿는다며 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막상 적지 않은 나이에 유학을 간 나는 중간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힘들어할 때 아빠는 괜찮다며, 돌아와도 좋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해 주셨다.

" 안되면 어때. 다른 거 하면 되지. 괜찮아!"

누군가의 말처럼 딸의 힘은 친정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하루하루 기억을 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건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딸이 원하던 직장 합격 소식에 그리 좋아하시던 기억도, 결혼식 전날 나와 손잡고 걷는 연습을 한 기억도, 손자만 있는 아빠에게 손녀가 찾아온 첫날의 눈물도, 아빠의 기억에는 없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예전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시더니 지금은 다 엉켜버리고 지워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아빠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나 다울 수가 없어졌다. 어떤 때는 시집 안 간 지영이가 되어야 하고, 어떤 때는 아빠 말이 다 맞다며 연기도 해야 한다. 아빠를 타이르는 철든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아빠의 실수에도 조용히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제는 아빠 앞에서 철없이 웃고 떠드는 나는 없다. 고민을 상담하고 슬픔을 나눌 아빠가 없어졌다.


지금의 나의 성격과 모습은 아빠를 닮아 있다. 나답게 살라고 다른 사람이 뭐에 그리 중요하냐고 늘 말씀하시던 아빠 덕에 아직은 줏대 있게 잘 살고 있다고, 사춘기 딸아이와 더 먹겠다고 아직도 종종 싸운다고, 다음 달에 아빠 딸이 쓴 책이 나온다고 방방 뛰며 이야기해 주고 싶은데...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하실 텐데...

아빠의 병이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고 점점 철들어 가게 하고 있다.

" 아빠~ 아빠 앞에서는 철없이 살고 싶었는데... 그치만 지금도 괜찮아. 대신 다른 건 다 까먹어도 내 이름은 까먹지 마, 알겠지? 아빠! 내 이름은 지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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