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는 사람들

현대인의 고독에 대하여

by 안진

기술의 발전으로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 매우 쉬워졌다. 정보의 과잉 시대이자 초연결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모습 이면에는 무연고 사망, 외로움, 고립 등의 단어도 쟁점이 된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의 소식은 알더라도 옆집에 사는 사람의 소식은 모르고, 온라인에서 텍스트로는 소통하더라도,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육성으로는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현재의 모습이라 정의할 수 있다. ‘고독’이라는 단어는 특정 세대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전염병이자 고질병이다. 동물과 식물에까지 공감의 폭은 넓어졌으나, 타인의 고통에는 놀랍도록 무감각하며 시스템은 일정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감은 헐거워졌고, 관계는 소비재처럼 쉽게 맺어지고 쉽게 끊어진다.

현대인은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한다. 시장에 내놓을 때 팔릴 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워나간다. 기계에나 적합한 단어인 스펙이나 외모, 학벌, 돈 등 외부적 인식을 정하는 것들에 지나친 관심과 투자를 하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개인의 가치는 생산성과 구매력으로 대변되며 이것들과 정확히 정비례한다는 인식 아래 갓생을 살아야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것으로 인정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오는 청년의 은둔 문제가 심각하다. 그냥 쉬었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도달점이 아득히 먼 상황에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도박 또는 포기며 대부분의 청년이 포기를 선택당한다.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수치심이 어떻게 방문을 걸어 잠그게 하는지 그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적 패배감인 것이다. 이런 청년들이 나이가 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중년 또한 효용 가치가 다하여 폐기되어야 할 부품처럼 처리되는 현상에서 사회의 온정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사상에서 인생을 고통으로 정의한다.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삶을 살아갈 때 고통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을 의미한다. 타자와 부딪히며 갈등하고 화해하는 광장이 당연하지만, 현대에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취향의 감옥에 갇혀 편향을 꾸준히 이어간다. 국가가 민주주의를 한다는 의미도 나와는 너무 다른 개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 낯선 타자를 경계하고 배타적인 태도로 나와 같은 것들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만 모이려 하는 것은 동호의 모임이 아니라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이는 인간의 하한선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인권이라는 것, 사람으로서, 사람이기에 존중되어야 할 것들을 저버리고 타인을 도구로 보는 타자성의 상실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모든 고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파괴적인 고립과 창조적인 고독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나 자신과 함께 있음을 의미하고 고립은 나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라 말했다. 많은 철학자도 단독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홀로 심연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존중하고 예찬했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요된 고립을 멈추고 주체적인 고독으로 회복할 수 있는 물적, 심리적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더하여 홀로 선 개인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홀로 선 타자의 이름을 부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자아의 이해를 통한 타자의 이해이자, 먼저 스스로 선 사람들끼리의 연대다. 고독과 고립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반대로 무조건적인 어울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사유하여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사람은 비로소 타자를 마주할 때 윤리와 도덕을 생각한다. 고독을 돌봄과 연결이라는 의제로 격상해 사회 구조적 해법을 모색하고 실패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사회적 매트리스,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공간 등의 해법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사회에는 곁을 내어주는 급진적인 정치가 갈급하다. 누군가의 부재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궁금해하며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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