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을 동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갇혀 있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나의 오만함이었다

by 안진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에서 아쿠아리움에 간 일이 있다. 사실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같이 인간의 필요로 생물을 넣어 놓고 돈을 받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그들을 보고 웃고 신기해하며 돈을 지급한다는 것이 어딘가 께름칙하다. 마음 한편은 불편하지만, 친구들과 간 여행이니 나름 내색하지 않고 아쿠아리움을 둘러보았다.

불편함을 가지고 간 것이지만 얻은 것이 있었다. 먼저 시선의 높이에 따른 풍경의 변화다. 아쿠아리움이지만 물속 생명들 말고도 여러 가지 생명이 있었다. 그중 카멜레온을 넣어 놓은 케이지가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설명에 나와 있는 카멜레온은 보이지 않았다. 어른 대여섯 명이 서서 카멜레온이 없나 보다, 있었는데 죽었나 보다, 아파서 다른 데로 옮겼나 보다 등 각각의 소설을 읊어댔다. 그러던 중 뒤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잡은 아이를 부르며 카멜레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라는 말이었다. 아이의 키는 성인 남성의 골반 정도였고 그 아이의 눈에는 케이지 위쪽 구석에 매달려 있던 카멜레온이 보였던 것이다. 그제야 어른들도 무릎을 꿇어 보니 카멜레온이 보였다. 카멜레온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얼마나 웃겼을까.

잠깐의 소동 후 먼저 부끄러웠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지어낸 내가 얼마나 얄팍한 존재인지 생각했다. 더하여 겸손함을 떠올렸다. 아이라도, 동물이라도 하나의 인격체이자 생명으로 존중하는 마음도 더러 떠올렸다. 필자는 나의 기준에, 상식에, 시선에 부합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이기주의자이자 배타적인 사람이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지를 생각한다. 다양한 시선이 있는 것이고 내가 옳을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일상의 모습은 그와 많이 다르다.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중 황희순 작가의 시집 <수혈놀이>를 읽었다. 시집의 첫 시의 제목은 ‘동물원 구경하기’로 사람은 동물을 보며 맹수라 생각하고 맹수는 사람을 보며 더 사나운 맹수라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은 동물을 우리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동물은 사람이 우리에 갇혀 있다고 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다시 부끄러워졌다.

서두에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을 떠올릴 때 필자가 가진 생각은 동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말이 아니라 더 우월한 존재이자 배운 존재로서 의식 있는 사람임을 자위하는 생각에 그쳤다. 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호혜를 베풀고 안타까워해 주는 고결한 존재로 여긴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탁월하다. 동물도 사람이 무섭지 않을까? 또 자유를 외치며 한없이 좁은 생각에 갇혀 사는 인간이 답답해 보이지 않을까? 너나 나나 자신의 삶에서 어딘가에 갇혀있는 불쌍한 존재였음을 몰랐다.

삶은 고민과 선택, 그리고 후회의 연속이다. 순간마다 개인은 우주의 중심으로서 중차대한 결정을 한다. 과연 그런가? 우주 속 사람은 무익한 존재다. 이제 지구에는 해로운 존재다. 사람들은 모두 필멸자임을 잊고 산다. 방황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어쩌면 삶 전체가 무의미한 방황일 줄도 모른다. 의미 없는 방황의 삶에서 조금은 덜 부끄러워지고 싶다. 한참 어린아이와 인간의 문명에 갇혀 있는 동물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던 모습을 잊지 않길.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자신의 저작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했다. 나의 방황이 덜 부끄럽기 위한 노력의 증거라 생각하며 위안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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