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어요?'라는 질문에 쉬이 답하지 못하는 까닭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지켜내는 것들이 있다. 거대한 문장 뒤에 오기엔 턱없이 실없는 문장이지만, 3천원 혹은 5천원을 더 주고서라도, 밥을 못먹더라도, 커피는 무조건 입맛에 맛는 걸로, 먹고 싶은 걸로 먹고야 만다. 커피, 내 사랑,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푸어 오버 전부! 집 근처에 맛있는 원두로 깔끔하게 잘 내려주는 카페가 있음에 살만한 동네라고 느낀다. 어휴, 값나가는 취향같으니.
요즘 부쩍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마지막 출장을 끝으로 여유가 생겼다. 주말 중 하루는 온전히 아무것도 안하고, 주중에도 쉬는 날이 있다. 저녁마다 꽉차있던 일정도 저녁일정이 있는 날이 두세번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이또한 다음주부터는 매일같이 저녁일정이 있지만, 짧게라도 한 일주일? 이번주까지 여유로운데 웃기지만 이게 정말 행복한 것 같다. 사는 것같고 좋아. 친구들, 가족, 애인하고 노는 것도 참 좋아하지만 온전히 홀로 살아가는 데에 온집중을 다하는 이 기분 너무 좋아. 다음은 뭘하고 놀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몇시간을 내 스스로 채울수 있는게 너무 좋아. 날 기다리는 두려움이, 잔업이, 밀린 일정이 없는게 너무 좋아. 물론 그 밀려있는 부담감에 너무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래서 당장 다음주부터 펼쳐질 바쁜 스케줄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겠지만.
장을 보고 물건들을 냉장고에 채운다. 설거지를 뽀드득 하고 샤워도 한다. 탈색한 머리를 공들여서 말린다. 말리는 김에 화장실도 솔로 벅벅 문질러 청소한다. 장볼때 사왔던 화분을 꺼내 얼추 자란 새싹과 큰 줄기의 식물들을 분갈이해준다. 뚝딱뚝딱 흙을 매만지며 베란다에서 놀다보면 옆에 있는 세탁기로 빨래 두어번은 기본으로 해내게 된다. 쌓여있는 쓰레기들도 들고 나가서 분리수거를 하고 운동복을 꺼내 입어 산책도 다녀온다. 참내. 이 쉬운 걸 이사와서 처음 해냈다. 어짜피 보지도 않을 영화, 줄거리를 읊어주는 유튜브를 보다가 괜히 울컥해서 엉엉 운다. 며칠간 드럽게도 많이 쳐먹더니 결국 생리할 때가 되어서였구나. 어쩐지 다리도 퉁퉁 부어 아프고 허리도 쑤신다더니. 책상에서 물러나 침대에 눕는다. 그래 사람들이 이래서 집에 가면 누워만 있는다고 하는구나. 좋아하는 배우가 무어라 샬라샬라하는걸 들으면서 잠에 골아떨어진다. 이렇게 일찍 자려했던 것은 아닌데 훔냐훔냐 정신을 차리면 다음날 아침 햇살을 만나게 된다. 참으로 기이하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하루들. 이런게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었다니.
햇볕을 받으며 얼마간 누워있고 싶다. 바다가 철썩이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가득히 평안을. 물안개가 핀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저기 멀리 뿌연 경계면에 유유히 흘러가는 저 배는 뉘고, 하늘에 손바닥을 펴 올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 구름을 움켰다 내려두고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그런 흐름, 하루 온종일 그렇게 누워있고만 싶다. 밤이 오면 날이 싸하니까 포근한 이불을 덮고 이름붙여두고 너가 너이던가 구분하지 못해 미안할만큼 수많은 별들에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렇게 긴밤을 보내고 싶다. 오늘 일정이 끝나면 기필코 저 책들을 읽고 편안한 밤을 맞아야지. 그러다 마음이 허락하면 글도 써야지.
나의 하루는 나로 살아내는 하루. 언제는 좋았다가 언제는 버거운 하루. 아침 8시 50분이면 눈이 떠지는 이상한 하루. 30분 뒤에야 울리는 알람을 끄고 양치를 한 뒤에 빈 손으로 출근을 하는 하루. 항상 봐도 반가운 동료들 얼굴을 들여다보고 모니터 화면도 들여다보고 가끔은 전화기도 들고 샬라샬라 떠들어대는 그런 하루.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면 그렇게나 기쁜 하루. 막상 퇴근을 하면 밀려드는 삶의 무게를 어떻게 훌훌 날려보내며 반 남은 하루를 보낼지 궁리하는 하루. 거부할 수 없는 밤이 오고 습관처럼 침잠하지 않기 위해 맛있는 저녁을 차리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베란다 식물들에게 물 한 바가지씩 퍼주고 게임을 하거나 글을 쓰는 하루. 손에 익지 않은 기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은 저 만치 밀어두고 찍은 영상으로 브이로그 편집하기 또는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기와 같은 외면하고 싶은 일들을 최대한 외면하는 하루.
한두 가지의 마지막 카드를 등 뒤로 꽁꽁 숨기면 가진 열 장의 패를 전부 내보일 수 있는 하루를 사는 하루들의 연속. 가끔은 카드의 배열이 흐트러져서, 카드 위로 물이 쏟아져서, 카드를 들고 있는 손이 너무 피로해져서 결국엔 모든 것을 흐트리고야 마는, 흐트러지고야 말았다고 말하며 그렇게 믿고 엉엉 울고마는, 그러나 정작 카드들은 세상 멀쩡한, 웃기고 우습고 보잘것없어서 사랑스러운 하루를 사는 그런 하루들의 연속.
언젠가 이 모든 하루들로부터 너무나 멀어졌을 때, 그때면 한 알 한 알 연결된 이 하루들을 보면서 마음 쓰려하질 않기를, 그렇게 될 수 있게 하루가 멀다하고 마음을 쓸고 닦고 청소를 한다. 썩어문들어질 것들은 내다버리고 너무 헐어서 고장난 부분은 뚝딱뚝딱 고치고. 볕 좋은 날 창을 내어 온 햇살이 가득 들어오게, 추위에 부들부들 떠는 이가 있으면 언제든 초대할 수 있게, 그렇게 튼튼하고 건강한, 다정하고 소중한 마음이 되도록 매일같이 가꾸며 하루를 일군다. 오늘 하루 이야기도 사진 한 장으로 문장 한 줄로 기록하여 마음 한 켠에 잘 걸어두고, 언제 또 먼지가 쌓이는 날이면 그 위에 또 다른 하루를 걸어둘 수 있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느긋히, 무던히, 열렬히, 그저 온 마음을 다해 흘려보낸다.
몇자 더 글을 쓰고 행복한 기분을 만끽한다. 락페스티벌로 알게된 엄청난 밴드, 뱀파이어 위캔드의 노래가 나를 이 야밤에 행복하게 만들어. 아주 만족합니다! 글은 쓰라고 있는 것이지. 뭐라도 두드리다보면 완성되겠지. 무턱대고 시작한 허망한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제각기 얽혀서 어떻게든 흘러, 흘러가는 못난 뗏목이 되는 거야.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여름의 한 문턱도 지났어. 이제 새벽 5시라고 해서 날이 쉬이 밝아지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 그치만 매년 여름이 너무 좋아지고 있어. 참 신기해,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언젠가 나도 공연할 수 있을 만큼 음악을 하고 싶다. 그래, 무엇이든. 이 계절을 잘 마무리하고 나면 계속 행복할거야. 충분히 까매지지 않았다. 피부가 더 타더라도 괜찮으니까, 조금 더 수영하고 조금 더 노래 부르고 놀자. 모처럼의 이 여름이 아깝지 않도록. 시간이 나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제안서도 어떻게든 쓰겠지. 뭐라도 어떻게든 될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나는 이제 더이상 내가 불러온 커다란 들짐승 때문에 놀라지 않아, 겁먹지 않아. 야생의 날것의 그대로인 그것들 모두를 그저 함께하며 살고야 말겠어.
나를 달래기 위해 어떤 하루를 산다. 맞아. 나는 그렇게. 그런 오늘, 어떤 하루를 잘 살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