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저기요, 배끼지마세요. 지치더라도. 지지않고 계속 창작하기란
네이버 웹툰 '드로잉 레시피' 20화를 읽고.
아주 어렸을 적 그림을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2학년 이었던 것 같다. 미술 시간이었다. 자유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하트를 그렸다. 하트 안에 하트가 있고 하트 안에 또 하트가 있는 그림. 그리고 색색별로 하트를 칠했다. 나와 친하지 않다 못해 사이가 별로인 여학생이 있었다. 빼빼마르고 유난이 크고 검은 두 눈을 가졌던 학생. 노는 친구들하고 어울리며 조용했지만 관심받기를 즐겼던 학생. 그 애가 내 하트의 하트 그림을 배껴 그렸었다.
하트 안에 하트를 그리고 혹은 하트 바깥에 하트를 그리는 건 쉽지가 않은 난이도였다. 특히 그림을 자주 그리는 않은 사람은 선이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애의 그림이 그랬다. 그러나 그 애는 그 느낌이 덜 들도록 하트의 하트들 옆에 다른 하트들을 넣었던 것 같다. 뭔가 더 발전한 느낌으로. 그 애의 친구들은 이 아이가 내 그림을 배낀 것임에도 두 그림은 다르다고, 내가 그 애를 배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다른 학생들은 큰소리로 말했다. 너 왜 쟤 그림 배껴? 그 중에는 그 애가 좋아하는 남자애도 있었다. 그 애는 크고 똘망한 눈으로 자신에게 천진한 질문을 하는 남자애의 눈치를 봤다. 시덥잖은 변명에는 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나는 쿨한 척을 했다. 괜찮다고. 가서 따지고 뭐 할 것도 없었다. 내 그림이 훨씬 예뻤으니까.
그러나 누가 배낀 순간 그림은 이슈거리가 될 뿐, 자랑거리가 되질 못했다. 그 애는 뻔뻔했다. 자기 상상에서 나온 그림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 학생들을 둘러보았을 때, 그 애는 빈 도화지였고 다른 그룹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겨야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너는 누구에게 (네 하트를) 주려고 그렸냐고. 그림이 뺏긴 것보다 더 불쾌한 순간이었다. 내 의도마저 사라져버렸으니.
글을 뺏겼던 적이 있었다. 페이스북에 곧잘 감성어린 글을 쓰던 열아홉 스물 시절, 이런 문장을 썼었다. "설렘이 필요해. 연애가 아닌 설렘" 뭐 이런 문장이었는데 그걸 배껴간 사람이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였다. 글을 쓴다고, 감성이 남다르다고 어필을 많이 하던 친구였다. 삼삼하고 매너도 좋아서 인기가 많던 사람이었다. 내 글도 종종 읽으며 좋아요를 누르던 그런 지인이었다. 더 나아가 그가 여러 일로 힘들어 했을 때 그가 사는 부산이라는 곳까지 새벽 버스를 타고 내려가 응원해줄 만큼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했었다.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친구는 자기가 낸 책에 내 글을 실었다. 그마저도 책 뒷면에 나오는 글이라 했나, 날개에 나오는 말이라 했나, 띠지에 나오는 말이라 했나. 나의 문장은 그의 언어로 바뀌어 어딘가에 박제되어 버렸다. 그걸 다른 부산 친구가 발견했다. 그 친구도 평소에 내 글을 자주 읽어왔고 또 스스로도 글을 쓰는 친구였다. 친구는 나보다 그 사람과 더 오랜 사이를 알고 지냈다. 아마 나보다 그와 훨씬 더 각별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자기의 문장을 훔쳤다면 길길이 화를 내고 절연을 했을 것이라고. 모두에게 알렸을 것이라고. 왜 아무런 말을 안하냐며 궁금해했다. 친구는 본인이 더 답답해하고 화를 냈었다.
그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설득되었을 무렵 적당한 용기가 생겨 그 애한테 내 문장 왜 배꼈냐고 물었다. 그 애는 처음에는 시인하며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그 문장이 어느 영화에서 본 것 같다며 너도 그런 게 아니냐고, 왜 새롭게 창작한 것을 그렇게 몰아 가냐며 되려 성을 냈다. 나는 해명을 해야 했다. 그러다 손쉽게 포기했다. 문장을 구하려 사람을 잃는 것이 괴로웠다. 썩은 인연은 끊어내야 했음을 알기엔 아직 튼튼한 시절이기도 했다.
나의 창작을 빼앗기는 경험. 썩 유쾌하지 않다. 완벽한 독립성을 갖춘 창작이 어디 있겠냐만은, 창작은 참. 어려운 일이다. 창작을 지키는 일은 더 어렵다. 이 세계가 그냥 그렇다. 그저 어렵다.
글 너무 쓰기가 싫다. 그럼 글을 왜 쓰세요?
안쓰면 죽을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을 때는 글을 써. 아 그러면 나는 죽고 싶은 것인가? 글이 쓰고 싶지 않은 걸 보니. 아닌가? 죽을 만하지 않은 것일까? 살만하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글쓰기가 싫은 걸까? 아니 그냥 나는 그저 귀찮은 것이야. 말을 줄인다. 글로 적는다. 말이 너무 많아. 특히 사람에게 하는 말. 대화를 너무 많이 해. 쓸 글이 없을 만큼. 그러니 입을 다물자. 몇 시간은 계속 다물자. 그리고 글을 쓰자. 역시 나는 계속 써야겠어.
오늘 마주쳤던 모든 순간들, 집을 나서던 때 나에게 다가온 겨울바람. 비좁던 9호선. 한가하던 김포공항 19번 게이트 앞.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보라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 그걸 털어내며 사부작 사부작 볕을 만져대던 모든 순간들. 건조한 손,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움켜진 시간. 차가워진 손, 서로를 맞잡으며 따스함이 차가움을 감각하던 신기한 기분. 산미 그리고 칼칼하고 텁텁한 맛, 둔탁한 바디감마저 느껴지던 커피가 물어온 여름 기억. 이륙하는 비행기, 점점 작아지는 김포시. 태양빛으로 매끄럽게 짠 비단같던 서해안, 그 사이사이를 까맣게 물들인 섬들. 옅은 가을 구름과 구웅 구웅 바람을 잔뜩 먹느라 바쁜 비행기 날개 엔진 프로펠러. 난다. 난다. 돈다. 돈다. 저 멀리 보여. 멀리 보여. 멀어졌어. 떴어. 날고 있어. 날고 있어. 묻지도 않은 비행 상황을 반복적으로 안내 방송하는 뒷자리 네살배기 꼬마, 그가 선사하는 등허리 마사지. 심각했던 마스크 속 구강 단내. 유난히 큰 짐이 많던 서울발 수화물들, 그 사이에 유난히 아름다운 나의 친구 캐리어, 아네쉬카. 붉은 인센스, 쇼팽의 녹턴, 따스한 포옹, 뚝딱뚝딱 블루스 춤 사위. 또각또각 마우스, 삐걱삐걱대던 아본의 종이양.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하루.
나는 온종일 글 쓰고 싶은 순간들을 마주쳤다. 쓸 것들이 한바가지. 그렇게 매일을 살았는데 매번 놓쳐놓고 한다는 소리가 귀찮아서. 그리고 여타의 이유로 의지를 빼앗겨서. 그럼에도 다시 오늘부터 나는 하루 열번, 지나가는 모든 순간을 붙잡고 부여잡고 아이고, 잠시만요, 몇자 적어보고 갈게요, 그렇게 쓴다, 글을. 어쩔 수가 없어. 결국 글쓰기는 이어진다. 여타의 이유로 의지마저 휘발되더라도 또 다시 어떠한 순간이 내 손을 움직이게 해. 그러니 이 순간과 이 세상을 계속 써나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