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김현정 Jan 26. 2022

양자역학적 인생관과 헌 해 소원

[에세이]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양자물리학에 대한 왜곡된 예시로 이해의 감각만 살려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에서도 그러다 시피, 왜곡이란 참으로 편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전자는 관찰하는 순간 붕괴된다. 파동이었던 전자가 입자로 변한다고. 위치와 속도(+방향)를 알면 언제쯤엔 어디에 있는지 예측가능하다, 다만 둘 중의 정보 중 다른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하나는 영원히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게 양자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로직 중에 하나라고 말했다.

유튜브 <안될과학> 양자역학 한 방 정리! 中


 갑자기 지오디의 '길'이 떠올랐다. 내 인생과 더불어. 무언가 미친듯이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계속 나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건지, 이러다 어디로 가는 건지, 그래서 이 다음은 어딜런지 영 알 수가 없더라고. 그러다 슬럼프가 또는 악재가 겹쳐서 쿵하고 주저앉는 날에는 그렇게 멈춰버린 시절에는 내가 어딜 향해야하는 지, 어떻게 해야 힘을 내어 나아갈 수 있는 지, 그래서 결국 어느매에 도착하고 또 나아가며 살아갈런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딱 그런 순간들의 반복, 20대 시절의 무한 루프. 과연 이게 20대에만 일어나는 일인가 궁금하긴 하다만, 어쩌면 양자물리학처럼 나아가는 중이든, 멈춰있는 중이든 숱한 가능성들로 가득한 미래를 쉬이 단정하고 확정하며 살아갈 수 없음 딱 그정도로 이해하고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겠지. 쳇바퀴 돌리고 멈추고 또 돌리고 멈추고 쳇바퀴 색이 달라지고 사이즈가 달라지고 모양새가 바뀌더라도 나는 또 걷고 돌리고 멈춰 섰다고 또 걷고 뛰고 엎어지고 일어서고 반복, 반복.      

 많은 것들을 해내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살짝 쉬는 시간. 그래봤자 하루정도겠지만 단 하루의 게으름조차도, '하면 좋은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채울걸, 괜스레 아쉬워하는 것은 결국 자기파멸로 치닫게 한다. 그러니 멈추어야지. 글 한 장을 쓸테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며, 왜 여전히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할 수가 없는 것인지 묻는다. 


 그래, 생각해보면 관대하면 안될 것에는 관대하다. 기후위기를 문제라 말하면서 단 한끼에서의 육식을 망설이지 않는 나, 대중교통보다 자가와 비행기를 망설이지 않고 선택하는 나, 부모와 조부모를 사랑한다면서 나이든 이들이 제일 바란다는 전화 한 통화를 매번 까먹어버리는 나, 그냥 그런 ‘나’들, 왜 양심도 도덕도 신념도 적당히 저버린, 위선적이거나 게으른 ‘나’. 그런 나에게는 관대하면서 '할일 목록', '하면 좋을 일 목록'을 외면하는 것에만 유독 답답하게 군다. 아무래도 사회가 만들어낸 '생산적인 인간'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고 변명해보지만, 언제까지 거대한 환상에 제 스스로 잡혀 살아야하는 걸까. 언제쯤 거대하게 부풀린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것이 정녕 '나'가 아님을 이미 이토록 잘도 알고 있음에도 왜.     




 지난 해를 전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다 썼다. 이해 못하겠고 너무 속상하고 미워 죽겠고,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왜 그랬을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이 다음이 있기를, 어떻게 해야 이 존재들을 이해하고 사랑할지, 질문, 해명, 설명, 정리한 마음 전달, 중재, 대화, 속앓이 듣기, 화풀이하기, 무시받기, 무시하기, 조언, 인내, 배려, 분노, 눈물, 콧물, 한숨, 그럼에도 진심. 진심을 잃지 않으려, 존재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별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 참 많이 다른 사람, 오래도록 봐왔던 사람, 오래도록 가까이 했던 사람, 오래도록 다퉈온 사람, 끊을 수 없는 사람, 끊겼던 사람, 새로 알게 된 사람 등. 사람에게 겪는 고통이 제일 버티기가 어려운 고통인가 싶다가도 제법 많이 품이 넓어지고 현명해져서, 능숙해져서 이정도로 고통받으면서도 잘도 헤쳐왔다. 파랑이 슬렁슬렁 일고 있는 2021년 끝자락 한 가운데, 남은 기간만이라도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아님 적어도 내년부터라도 제발, 좀 평안하게 살기를 바래보는 마음. 해가 다 가는 시점, 헌 해의 소원을 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나의 위치, 내가 어디에 있는 지- 이제 분명히 안다. 더이상 '길을 잃었다'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방향 그리고 속도 또한 큰 불안함없이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새해는,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지 명확히 알 수 있는가?

 이에 대답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추론값으로 현상을 정의하고 있는데 정답이란게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우습지만 도출되는 미완의 답, 필히 틀린 그 답은 내게 큰 위안이 된다. 과거로부터 떠나 현재, 더 나아가 내일을 원하는 그림으로 그리고 만들어가는 삶. 스스로의 부족함과 못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고 제 현실을 그저 받아들 일 수 있는 삶. 그러니 만점짜리 답안지같은 인생은 아닐지라도 퍽 행복하게, 충만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헌 해 소원을 몽땅 부어 한 해를 마무리했으니 새해엔 새해 소원을 빌어야지. 그럼 또 다시 예측 불가능한 삶을 마주하겠지.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내 미완의 답은 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다. 그러니 지난 해도 다가온 새해도 적당히 행복하고 조금은 더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이전 02화 이런 서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