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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김현정 Apr 25. 2022

이런 서른

[에세이] 이런 식으로 서른을 맞고 싶지 않았어.

 

문제의 아쿠아병


이런 식으로 서른을 맞고 싶지 않았어. 그런 말을 안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언제였나, 지난 스물일곱에서 여덟으로 넘어갈 즈음. 내 머리맡 책상 근처에는 아쿠아빛 유리병이 있었다. 유리병은 열아홉 고등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둔 12월 그 시절, 친한 친구들에게 10년 뒤에 읽어볼 테니 10년 뒤의 나를 생각하며 편지를 써달라 요청해서 받았던 쪽지들이 들어있었다. 스물여덟 어느 날 번뜩 그 유리병 속에 비친 한 문장이 나를 흔들었다. '서른의 너는 뭐라도 되어 있겠지. 맨날 성공하고 말 거야 말했으니까.' 서른까지 2년도 남지 않았는데 난 여전히 '뭐'조차도 되어있지 않았다. 나이에 따른 조바심, 난 그런 거 없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려고 저 자신에게 성가시게 굴곤 했는데 어린 친구에게 받은 저 두 문장에는 어찌나 손쉽게 흔들리던지. 10년 전의 나, 열아홉의 치열했던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을 10년간의 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 건 허상일 뿐, 자아존중감을 시험하는 것일 뿐이라고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 뚠뚠뚜 뚠뚠두~ 2016, Naoshima, Japan.


 그래서 스물여덟 그해 가을. 정신과 상담을 시작하며, '방향을 찾으셔야겠어요.'라는 의사의 지나가는 말 수준의 한 마디에도 질끈 마음을 다져 매고 창업을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 혜화 쪽에 내 작업실을 차리자. 거기서 기획자 또는 창작자로서 기틀을 다지자. 사람들이 모여 만나기 어려운 코로나 시국이라지만 그래도 하자, 할 사람을 해야지, 사람을 위한 일, 사람과 만나는 일, 만남을 꾸리는 일,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제 일을 해야지. 그래야 정말 서른 즈음엔 '뭐'라도 되어있지 않겠어. '성공'까진 모르겠다마는. 그 마음으로 자금을 모으겠다며 계약직 일을 하고 그 일이 끝나자마자 심신을 달래면서 초기 기획을 하고자 제주로 내려갔더랬다. 되려 제주에 내려가서는 친구가 마주한 일에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가능성을 엿보곤 저 스스로 무임금으로, 예비 사회적 기업을 제대로 굴려놓는 일에 몸소 투신했다.



 그 결과로는 무엇을 얻었느냐고? 잃은 게 무척 커 보였다만 이제 와 따져보면 제법 얻은 것도 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제주도에 적을 둔, 새내기 제주도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운 좋게도 적극적으로 운동과 사업을 하는 여성단체에 일하게 되었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으며 제주도민 인생을 본격적으로 살게 되었다. 얼떨결에 문학동인 내고 싶다 노래 부른 일로 출판사까지 차려서 문우들과 글을 잣고 엮는 일까지 하고 있다. 10년 전도 아닌 3년 전의 나와도 너무나도 그림이 다르지. 동북아 평화 공부와 운동을 하던 그때와도, 5년 전 청년 운동을 하던 그때와도, 10년 전 지금 같은 삶은 전혀 꿈꾸지도 않았던 그때와도 참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태까지 살아남았고 실패한 것보다는 꿈꾸거나 뭐라도 해낸 것이 많다는 것에, 잃거나 빼앗긴 것보다는 얻거나 되찾은 것들이 많음에, 슬픔과 죽음, 우울과 고통이 곁에 있던 시간을 넘어 평안과 기쁨이 언제든 다시 찾아오는 일상이었음에 마음 깊숙이 안도의 물결이 번진다. 이 잔물결이 걱정과 두려움이 되어 요동칠 때도 있겠다만, 또는 다시금 버티지 못할 쓰나미가 올 수도 있겠다만 그럼에도 내 중력은 영원함을 잊지 않을 본성과 일희일비할 수 있는 기억력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거니 생각해본다. 그런 식으로 서른을 맞는다.



 이런 식으로 서른이 될 줄 몰랐는데, 영 나쁘지만은 않다. 10년 전의 나에게 ‘딱 이 정도의 나로 늙겠다만 너 10년 꽤 살만하다?’ 그리 말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여전히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 못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런 서른 꽤나 괜찮다고 살아볼 만 하다고 조금은 말할 수 있다. 아주 조금이지만.     




 서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스물이 그랬듯이. 심지어 열 살 때는 기억도 안 난다. 드디어 열 손가락 다 펴서 나이를 설명할 수 있었음에도 무엇하나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질 않았지. 그렇지만 스물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열아홉, 10대라는 시절을 빼앗겼음에 속상했다. 더이상 열다섯, 열일곱 이런 걸 못한다는 생각에. 스물이고 스물하나고 하나도 원치 않았다. 스물하나가 되었을 때에도 속상한 마음이 더 컸다. 이따위로 스물하나가 되어버리다니. 스물하나라니, 스물의 2단계 정도로 해주면 안 되나, 난 아직 스무 살이라는 것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내일 모래면 서른이라더라. 말 그대로 내일 모래. 


 너무 싫다. 서른이고 뭐고, 좋아하기 힘들게 세팅된 사회적 개념어에 좋네 마네 의미가 있네 마네 하는 것도 우습고 힘 빠지는 일이지만 뒤돌아갈 수 없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시간은 그저 하나의 방향만으로 속절없이 흐르기만 한다는 사실이 참 싫다. 내 손을 타고 스쳐 지나가는 물줄기처럼 흘러 흘러 어디를 가려는지. 붙잡고 물을 수도 모아놓고 되묻고 가득 끌어안을 수도 없지. 덧없다. 산다는 것은 향을 피워 멀리멀리 연기를 흩뿌리는 일보다도 더 덧이 없다. 살아생전 이름 한 자 남기는 것도 의미가 없다. 가치가 없다. 오늘 나를 낳은 사람으로부터 네 성을 남기려는 행동(자녀에게 모성 부여), 그 별거 아닌 것에 열정을 다하는 것이 참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 나를 낳아 이름과 성을 붙일 때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으면서 일평생 그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나에게 진정할 수 있다는 말이 '왜 그러려는지 영 이해되지도, 지지할 수도 없다만 네가 한다는데 뭐'뿐이라니. 그래놓고 내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것은 너무 웃기지 않냐. 무슨 행복을 느끼고자 이생을 겨우 살아가는 것일까. 앞으로의 내 인생은 지난날보다 어쩌면 더 치열할 수밖에 없을 텐데. 참 쉽다. 참 우습고 쉬운 인생이다. 누가 아까 지나가다 밟아 죽인 벌레와 같이 참 별거 아닌, 아무것도 아닐 덧없는 내 삶.     


 그럼에도 내가 나의 서른을, 30대의 인생을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10대이던 당시, 미래는 분명 더 나은 인생일 것이라, 기필코 그렇게 만들겠다며 핏방울 어린 주먹 쥐던 그 마음. 그 심정으로 빚어낸 20대에 대한 기대 혹은 열망 그것들과 비슷한가? 아니, 분명 이 마음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은 같은 값으로 존재한다. 당시의 오기와 투지, 독기 그런 게 가신 희망.


 내 서른은, 나의 30대는 분명 더 나은 인생일 것이다. 하고자 하는 것들을 잘 해내고 좋아하는 것들과 마땅한 것들, 삶에 더욱 진지하면서도 깊숙이, 흔들리지 않으며 강인하게, 건강하고 강력하게 살아낼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불운이 찾아오고 잘 풀리지 않거나 또다시 길을 헤매게 되거나 수렁에 빠지거나 발목이 잡히거나 손이 잘릴 위기에 처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행복할 것이다. 그 시간들을 건너고 건너서 결국 아주 가끔 방문하는 종달새 같은 행복에게 기꺼이 내 어깨에 쉬었다 떠나가라 그렇게 일러줄 수 있는 30대를 살 것이다. 행복이 잠시 스쳐 가면 그 흔적에서 온기를 이어받아 얼마간 또 평안히 살겠지. 그러니 애써서 먼저 죽음을 만나러 가지 않고, 어쩌면 나를 잃지 않은 채 마흔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흔. 내 삶의 전성기겠거니 그러나 단 한번도 선명하게 꿈꿔보지 않은 시간까지 10년이 남았다. 그땐 지금보다 조금 더 늙었을까. 정녕 내 성을 이었을 아이와 함께일까. 내 친구들은, 애인은, 가족은 곁에 있을까. 나는 어떠한 봄바람과 태풍, 함박눈과 무더위를 건너서 그쯤에 도착할까. 사람 구실은 할까. 마흔의 나도 지금의 나에게, 30대의 10년 살아봄 직하다고, 지금의 나보다는 조금은 더 강하게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런 마흔이 될 수 있을까. 나의 30대는 아직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내가 잔뜩 이고 있는 이 기대감을 어떻게 지고 나아가려나. 무너지지 말아야 할 텐데. 결국엔 혼자, 또는 스스로마저 잃게 된다면 나는 마흔이 될 수 없겠지. 아무것도 아닌, 뭐도 아닌 삶. 덧없는 삶. 그럼에도 삶. 왜 삶? 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채워가는 이 여정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까. 서른을 흐르다 보면 끝이 날까.




 그럼에도 살아보고 싶다, 살아볼 만하다 그만한 작은 의지 또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지독한 10대와 치열한 20대를 살아내었음이라 생각한다. 별거 아닌 삶을 별거인 양, 대단한 무언가를 마주한 듯 살아낸 삶. 건너고 보니 이제야 보이는 나의 그림자. 연하고 때론 짙은 내 그림자. 그러나 흔들릴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내 그림자. 이 그림자가 늘상 따라붙을 테니 단단히 붙들고 서서 이 횃불, 고장 난 나침판, 엉망진창인 지도 위에서 든든하게 걷는다. 뒤돌아보면 아주 영영 꺼져버릴 저주 덕분에 아무리 그리워도 등 뒤에 두고 온, 조금은 더 어리고 젊은 그 시절의 나에게 작별인사조차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애들이 이어준 힘으로 다시 걷는다. 나아가는 것만이 방법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아가는 수밖에. 부서질 수도 무너질 수도 없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서른이 되어 마흔으로 갈 수밖에.


 횃불을 든 이상 영원히 함께할 내 그림자와 평생, 어떻게든, 매일을 어떻게든 잘 살자. 행복하자. 일희일비하며, 그러나 조금은 더 행복하게 잘 살자. 그럴 서른을 기대한다. 조금을 더 행복하게 살 나의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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