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취준, 너 대체 뭐야? 게임캐릭터도 있는 직업, 왜 나만 없어
립스틱을 샀다. 처음으로 에스쁘아 브랜드를 샀다. 립스틱 디자인이 거진 올 블랙이나 스틸인 것만 쓰다가 매트한 촉감의 분홍빛 바디여서 별로 안땡겼지만 하루 만에 너무나도 예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에스쁘아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알려줘서.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격대가 아주 없지 않는 브랜드라서 딱히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의 립스틱 기호는 무조건 스틱, 밤도 틴트도 아닌 무조건 스틱에 매트하게 표현되지만 촉촉할 것. 지속력도 최소 2시간 이상일 것, 색감은 그 시절의 내 얼굴과 잘 어울릴 것.
한 4년 전인가, 웨이크메이크 브랜드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머리가 희한한 노란색이어서 무슨 립을 살까 고민하다 괴랄할 수도 있는 보라색을 샀었다. 오키드 퍼플. 이 색상을 낸 브랜드로 웨이크메이크가 유일했다. 머리색이 블랙으로 바뀐 다음 그 색상이 나랑 안어울린단 걸 알아서 어떤 립을 써야하나 한 몇달을 방황했었다. 그 브랜드 립스틱이 입술이 갈라지지 않게 하면서도 색이 적당히 잘 유지되는 편이여서 맘에 들었었는데, 때마침 벽돌색이 유행하며 말린 장미라인 컬러가 나왔었다. 몇개를 시도해본결과 내 인생 띵 컬러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게 아마 2017년 여름일 것이다. 세일을 할 때면 그 립스틱을 2개씩 사서 최종적으론 총 5개를 썼다. 그러나 2019년 하반기 쯤에 또 전 컬러 리뉴얼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 컬러와 가장 비슷한 것을 올리브영 전 브랜드에서 찾아봤지만 딱히 없어서 그나마 비슷한 걸 웨이크메이크에서 샀는데 문제는 이 립스틱이 입술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묘하게 다르다. 이전거와. 입술이 탁하게 색이 빠지는 느낌도 없잖아 있고. 내가 늙어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너무 극적인 변화였어.
말이 길었는데 아무튼 이번에는 괜히 같은 제품을 사기가 싫었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컬러보다 나를 좀 더 환하게 밝혀주는 새로운 컬러를 발견해서 립스틱 바디가 맘에 안 들어도 사게 된 것이다, 그 에스쁘아를. 처음 샀을 땐 몰랐는데 오늘 처음 써보니 은은하게 장미향이 나는 것이 뭐랄까, 공주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진짜 문자 그대로 공주된 기분. 예전엔 그냥 립스틱 슥슥 칠하고 끝이었는데 괜스레 예쁘게 웃으며 입술에 곱게 그리게 되는 이상한 기분. 매우 만족스러운 구매였다.
작년에 첫 월급을 타고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줬다. 중학교 때 너무나 신고 싶었던 컨버스사의 분홍색 하이탑 컨버스. 십여년, 오랜 기간 정말 사고 싶어 했었다. 그냥 돈 모아서 사면 될 일이지만 의미를 더 부여서 딱 좋은 날, 딱 좋은 마음으로 사고 싶었다. 사실 급여가 협의 및 합의 없이 지연되면서 나의 경제축이 흔들리게 되었다. 실상 삶이 상당히 피폐해지고난 뒤에서야 겨우 받은 보상이었기에 전혀- 보상의 기분이 안 났던 것이 사실이다.
이 립스틱도 그렇다. 한 2주 전쯤? 립스틱을 거의 다 써서 새로 사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뭔가 새 직장이 생기면, 재취업에 성공하게 되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서 립스틱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어떤 걸 살지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직장이 결정되면 그 기쁜 마음으로 뭔들 안 예쁘겠어, 그 마음으로 구매하고 싶었거든. 그러나 우습게도, 거의 2달을 소모했던 모 회사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끝났다.
부정적일 것을 알아서였는지, 결과 전화가 온 날- 나는 립스틱을 구매했다. 사실 경제사정이 몇 만원을 편히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 에스쁘아를 구매할 생각이 없었지만 내게 립스틱을 사줄까 평소에 생각했다는 애인이 나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더니 그냥 사라며 대뜸 사주었다. 없는 형편에 '보상'이라 운운하며 립스틱을 사느냐, 혹은 안타까운 눈빛을 받으며 선물 받느냐의 차이 정도인가. 에스쁘아의 장미향을 맡고도 공주는커녕 씁쓸해지는 것은 왜인지.
돈이 없어도 궁상떨지 말아야지, 오늘은 유독 그런 마음이 들어서 온종일 열심히 일한 나에게 상으로 햄버거를 사주러 가게에 들어갔다. 문제는 궁상은 떨지 않되, 사치는 부리지 말라는 계시렸나? 40원이 모자라서 라지 세트를 살 수 없었다.
혼자 밥 먹는데 돈 걱정안하고 그냥 외식하지 뭐, 쉽게 결정했던 게 언제였던지 기억도 안나는 사람으로서 오늘 겪은 일이란, 참으로 웃겼다. 여기저기서 푼돈이야 들어오겠지. 자잘하게 일한 급여나 환불된 기프티콘이든 뭐든. 근데 그게 참 무슨 의미일까. 40원이 없었던 것도 무슨 의미일까. 휴대폰 요금이라도 아끼려고 가장 저렴한 요금제를 써서 데이터 500메가를 쓰고 그 다음엔 3G가 연결된다. 덕분에 체크카드 잔고를 아무리 확인해도 데이터가 느려 업데이트가 되지를 않았다. 500원이 추가되는 라지세트를 사기에는 40원이 부족하다는 걸 키오스크 앞에 서서 결제 시도 5번 끝에 알게 되다니! 인생 참 웃긴 일들이 잔뜩이다.
오늘같은 밤엔 글을 써야지. 그리 마음을 먹고 이 새벽의 허기를 차로 달래고자 어수선한 내 찻장을 쳐다봤다. 사실 찻장을 보기도 전에 내 마음은 정해져있었지. 두 해 전에 스위스에서 샀던 '철학자'라는 이름의 허브차. 이 밤, 하루 종일 카페 아르바이트로 커피 냄새에 시달려 카페인 과섭취를 앓는 나에게 딱이다.
최근에 어느 모임에서 누가 그랬다. 자기는 생각을 안한다고. 생각이라고 할 게 없다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눈뜨고 먹고 운동하고 그냥 그렇게 산다고. 방금 전까지 분명 내가 이상과의 괴리로 공허함과 고통을 겪어 이를 극복하는데 힘을 쓴다, 우울은 내가 혐오하면서도 숭배하는 나의 일부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자기는 그럴 일 없다는 발언에 어이가 없어 그대로 벙찌고 말았다.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심지어 불쾌하지도 않았다. 정말 생각이란 걸 안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할테니까. 타인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배려도 없는 발언을 하는 그 순간에도 그 발언이 문제가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없었겠지. 애초에 생각이란걸 안한다니까.
언젠가 A랑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A가 내게 이런 말을 하면서 울부짖은 적이 있지. "생각이란 게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나도! 버튼같은 게 있어서 뇌를 꺼버리고 생각 따위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생각이 많아서 괴롭다는 그의 말에 '그럼 생각을 하지마. 그럼 되네.'라고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듣고 온 뒤였다.
생각이란 게 버튼이 있어서 끄고 싶을 때 꺼진다니. 정말 환상적이지 않나? 불행히도 꺼졌으면 좋겠을 땐 절대 꺼지지 않지. 정신 차리고 보면 꺼져있는 삶을 사는 경우야 발생한다만 그건 시간이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 줘야 가능한 일. 혹은 내가 그 시간까지 도착해야 가능한 일. 나는 하릴이 없어 생각만 하는 철학자가 되어 배를 굶고 이해도 받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퀘스트라면, 언제쯤 종료될까. 이번 생은 생각 많은 철학자. 보상도 레벨업도 보장되지 않는 퀘스트와 고유 스킬 ‘생각하기’. GM의 큰 그림을 이해하기엔 플레이어의 역량이 이모양이다. 스스로를 모애화 하는 게 참 웃기다. 철학자는 무슨 철학자야. 자의식과잉도 이런 과잉이 없다. 그냥 긴 동굴을 지나는 여느 인간일 뿐.
이 동굴 끝엔 나는 어디에 도착할까. 내 두 발은 괜찮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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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재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