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나니까

그래서 난 누워만 있는다

by anna

박혜윤 작가의 <도시인의 월든>은 인생 책으로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책이다. 정작 대학시절에 읽은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은 무척 지루했던 감상만 남았는데(대학 필독 도서라 겨우 읽었고 내용도 기억이 안 남), 박혜윤 작가의 책은 표지에 적혀있는 '부족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태도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벌써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나는 화가 날 때 의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이렇게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나, 아무것도 아닌 나.'


오늘 아침에도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신랑이 한 말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어제 배송 온 두루마리 휴지를 정리해두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는 그걸 흘려듣지 않고 '뭣이라?' 하는 눈초리와 함께 낚아챘다. 사실이었다. 30개 들이 두루마리 휴지 덩어리가 소파 옆에 그대로 서있었다.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신랑은 출퇴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많은 종류의 집안일을 내가 책임지고 있다,라고 쓰고 생각해 보니 신랑이 하는 일은 빨래가 전부이다. 하지만 큰 불만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계를 유지하는데 신랑이 나보다 큰 몫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두루마리 휴지를 화장실 선반에 차곡차곡 넣어두는 대신 어떤 일들을 했냐 하면, 내 근무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원한 아이에게 간식을 챙겨 먹이고 학습지 풀기를 같이 했다. 그야말로 거실과 책상 앞을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회사 메신저에 빠짐없이 답장을 보내는 동시에 색종이와 택배 상자, 풀과 털실 따위를 모두 꺼내다가 종이 접기와 만들기를 했다. 저녁밥을 차려 먹이고 과일 후식을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책을 읽어주고 목욕을 시키고 오목을 두고 보드게임을 했다. 자,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두루마리 휴지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듣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만 나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아무것도 아닌 나'하고 주문을 외운다.


<도시인의 월든>에 이런 문장들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게 없을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또 다른 믿음이 하나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믿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게 그렇게 못 참을 일인가? 그게 뭐 어때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침에 기분이 언짢았던 이유는 내가 업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아이를 돌보고 살림한 것을 치켜세워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깟 두루마리 휴지는 못 본 척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떡했냐 하면, 두루마리 휴지 덩어리를 눈에 안 보이는 방구석에 밀어 두고(발로 차서 옮김) 소파에 벌렁 누웠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 위에 올려두고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정신승리를 해냈다. 회사일과 돌봄, 살림을 모두 하는 워킹맘이고 뭐고를 다 잊고 '난 그냥 자연인이야' 한참 생각하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박혜윤 작가가 말한 바가 이런 건 아니겠지 싶지만 여튼간에 책 속의 명언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


이런 생각을 한 지 몇 시간이 흘렀고 나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두루마리 휴지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아이 엉덩이를 닦으려면 휴지가 제 자리에 있어야 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우리 아이 엉덩이는 지켜야 하니까. 내 업보다. 내 아이 내 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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