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차 재택러의 하루
8시 50분에 노트북을 켠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꼭 9시 전에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하고 싶다. 키보드, 마우스, 듀얼 모니터 전원까지 켜면 윙-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훈훈한 기운이 돈다. 메신저를 열자마자 어제 한 일을 복기하고 오늘 할 일을 중요도 순으로 적어 공유한다. 엔터 키를 누르는 동시에 시간을 확인하면 8시 55분쯤. '시작되었군.' 하는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향한다. 엉망진창, 그야말로 초토화다. 지난밤 야식의 흔적, 아이가 먹다 남긴 밥이 식탁 위에 흩어져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못 본 척하고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신다. 텀블러 가득 얼음을 채우고 커피를 한 잔 내려서 다시 끝방으로 간다. 노트북이 세팅되어 있는 끝방은 현관에선 가장 가깝고 부엌, 거실, 안방과는 떨어져 있다. 메신저에 읽지 않은 메시지를 쭉 확인해 본다. 이메일도 열어본다.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당장 회신할 건 없다. 그렇다면 포털 사이트를 열고 연예뉴스를... 아니 이런 이야기를 다 적어도 되나.
메신저에 새로운 알람이 뜨지 않는지 눈치를 살피며 할 일을 하나씩 착착 처리한다. 집엔 카페도 탕비실도 옥상정원도 없으니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땐 개인 메일함을 열어 뉴스레터를 읽는다. 하나 둘 구독을 추가한 뉴스레터가 제법 여럿이라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앉은자리에서 부지런히 받아본다. 한참 읽다 보면 아차차, 사내 메신저에 빨간색 숫자 2가 깜빡이는 걸 이제야 봤다. 나는 재빨리 읽던 창을 내리고 업무 스위치를 켠다. 업무 시간에 응당 해야 하는 일인데 예상치 못한 일거리가 생기면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랄까. 내 시간 뺏긴 기분...이라고 적으면 안 될 것 같지만 반은 농담이고 반에 반쯤은 진심이다.
12시가 되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점심 먹을 준비를 한다. 그사이 아이가 먹다 남기고 간 밥은 그릇에 말라붙었다. 12시부터 먹기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프라이팬에 내키는 대로 재료를 모두 넣고 원팬 파스타를 만든다. 파스타가 익어가는 동안 나는 하루 중 가장 민첩하게 움직인다. 앞치마를 두르고 잽싸게 청소기를 돌린다. 널브러져 있는 설거지 거리를 싱크볼에 넣어두고 저녁 반찬거리 만들 게 있을지 냉장고를 열어본다. 대강 할 수 있는 멸치볶음, 시금치 무침 정도를 만들고 나면 프라이팬 속 파스타는 칼국수 비슷한 모양이 되어있기 일쑤다. TV를 틀고 조금 서둘러 식사를 마친다. 설거지까지 해두면 얼추 1시쯤이다. 양치를 하려고 화장실에 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어떤 날은 너무 하다 싶을 때가 있다. 아침에 분명 세수를 했는데 안 한 기분. 머리를 고쳐 묶고 립밤도 좀 바르고 다시 끝방에 들어가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동요가 필요해. 유튜브에 재즈피아노 같은 걸 검색해 틀어둔다. 영어고 한글이고 가사가 있으면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이틀에 한 번쯤 화상회의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날엔 키보드 치는 손가락이 더욱 분주하다. 오후엔 일하는 사람들 모두 활성화가 되는 걸까. 오전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배가 된다. 노트북,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좀 갑갑한 느낌이 들기 십상인데 그럼 또 부엌으로 가 커피를 한 잔 리필한다.
5시쯤이 되면 업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된다. 슬슬 빠뜨린 건 없는지, 내일 해야 할 일 중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어떤 건지 따져본다. 이대로라면 오늘 칼퇴도 할 수 있고 내일도 어렵진 않겠어.라고 생각하면 꼭 5시 반쯤 무슨 일이 터지고 마는 건 출퇴근할 때나 재택근무할 때나 마찬가지이다. 재택근무가 익숙해진 뒤로는 약간의 야근을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퇴근길 지옥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 가는 길에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전에 뉴스레터 읽을 때 좋았네, 생각하면서 일을 마저 하고 노트북을 덮는다.
업무 스위치를 끄고 사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데 20초쯤 걸린다. 어떤 날은 점심시간에 목에 건 앞치마가 그대로 걸려 있다. 아차차,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화상 회의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생각하다 보면 문득 알게 된다. 나 오늘 한 마디도 안 했다. (아침에 아이 등원시키고 남편 출근길 배웅한 이후로) 종일 회사 일 하는 동안 한 마디도 안 했다. 굳게 다문 입 때문에 위아래 어금니가 딱 붙어버린 기분. 턱이 뻐근한 걸 느끼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면 맞은편 아파트가, 초등학교가 보이고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들린다. '나 일하는 사람 맞지?' '응. 맞아.' 혼자 마음속으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적어보는 재택러의 하루. 아무튼, 재택근무 좋고 나 오늘 한 마디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