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일상 분리하기
재택근무 장점을 꼽으라면 어떤 걸 먼저 말해야 할까 고민스러울 정도로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출퇴근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머리 모양, 화장,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붐비는 전철이나 나 버스에 몸을 끼워 넣을 일도 없다. 어디라도 제정신으로 앉아서 노트북을 열면 그게 출근이다. 규격화된 사무실을 벗어나 업무 환경을 취향껏 세팅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언제든 가구나 사무기기 위치를 바꿔볼 수 있고 배경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걸로 종일 틀어둘 수 있다. 비용 절감도 상당하다. 교통비는 둘째치고 옷차림이 자유롭다 보니 여러 벌의 외출복을 갖춰두지 않아도 된다. 립스틱 길이 줄어드는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미용실에 가는 주기는 조금 길어졌다. 밥값, 커피값도 밖에서 사 먹을 때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자율출퇴근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은행, 병원, 동사무소 같은 데서 볼일이 있을 땐 일 처리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개인적인 일을 볼 수도 있다. 또 워케이션을 적극 권장하기 때문에 여건만 된다면 국내외 여행지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하기 마련인데 비대면으로 소통해서인지 얼굴 붉히는 일이 거의 없고 오히려 내적 친밀감이 깊어지기도 한다. 워라밸은 말해 뭐 해. 덕분에 재직기간이 길어질수록 애사심이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만 쉽지 않은 것이 일과 일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집을 쉬는 공간으로만 여겨왔는데 침대와 소파, 식탁이 한데 모여 있는 집에서 하루의 반을 직장인으로 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법 의지가 필요하다. 편안한 차림새로 있되 머리와 마음으로는 적당한 긴장감을 가진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시공간은 자유로워도 직장인으로서 오늘 혹은 이번 주에 해야 할 일 목록을 잊어서는 안 된다.
5년 넘게 재택근무를 하면서 나 혼자 정한 몇 가지 행동지침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눕지 않는 것이다. 누우면 죽는다. 침대는 물론이거니와 소파에라도 잠깐 누우면 그날은 망하는 것이다. 재택근무 초창기에는 소파에서의 짧은 낮잠을 즐겼다. 깜빡 눈 붙였다 일어나면 그래봐야 10분 남짓이었다. 처음엔 합리화를 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분위기 전환을 핑계로 커피를 사러 가거나 공연히 옥상정원에 나가보지 않던가. 오며 가며 동료와 잡담을 해도 10분은 훌쩍 지나기 마련이니까.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어서 시에스타라고, 짧은 낮잠이 머리에는 휴식을 주고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핑계를 대면서 종종 소파에 누웠다.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피곤한 정도와 상관없이 너무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뤘던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깐 충전하고 파이팅 넘치게 시작하자! 결심하지만 스륵 잠들었다 눈을 떠도 일하기 싫은 마음은 그대로였다. 어떤 날은 10분 자는 거나, 쉬는 거나 마찬가지지 하며 누운 자세로 스마트폰만 내리 보는 날도 있었고 그러면 시간은 더욱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회사 메신저를 흘깃 보고 '별일 없군' 하며 내 몸뚱이 일으켜기를 미루고 미루는 일도 빈번했다. 아침에 기상 알람을 수차례 미루는 것과 같이 책상 앞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 자꾸만 늦어졌다. 개운하게 일어나 앉았느냐.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리가 무겁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도 리듬을 찾지 못했다. 할 일이 많은 게 아닌데 이상하게 집에서 야근이란 걸 했다. 그래서 결국 잠시 잠깐이라도 누우면, 아니 소파 근처에 가면 그날은 망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나만의 규칙 중 하나는 일하는 중간에 냉장고 문을 열지 않는 것. 옛날말로 진짜 뻔질나게 냉장고 문을 열어댔다.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내리면 어쩐지 곁들일 간식거리가 있어얄 것 같아 땅콩 부스러기라도 가져다 먹었다. 점심시간 전에 출출함이 느껴지면 후다닥 냉장고 문을 열고 두리번거렸다. 과일, 빵, 떡은 왜 우리 집 냉장고에 없는 날이 없는지. 부지런히도 주워 먹었다. 어떤 날은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냉장고 문을 열어보러 부엌으로 총총 향했다. 그냥 심심하면 냉장고 문을 열러 갔다.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집어먹었더니 체중이 느는 것은 당연하고 식사습관이 엉망이 되어 갔다. 오전에 뭘 많이 먹으면 점심시간엔 입맛이 없다가 오후 서너 시쯤이 되면 또 허기를 느끼고 먹을 걸 찾아댔다. 그리고 밤 11시가 되면 야식 먹는 낙으로 살았다.
이제는 오전에 씹을 거리를 입에 넣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일하는 시간을 정해뒀듯 밥 먹는 시간도 정해두었다. 오전엔 물과 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시고 낮 12시부터 저녁 8시까지만 음식을 먹는다. 덕분에 오전에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고 점심시간엔 비교적 갖춰진 식사를 할 수 있다. 오후 시간에 밀린 간식을 먹기도 하지만 끼니를 대신하는 건 아니다. 이런 걸 간헐적 단식이라 쓰고 간헐적 폭식이라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식사 시간을 제한하는 것만으로도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수많은 회사가, 직장인들이 12시로 점심시간을 정해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재택근무 하는 사람들에게 집이란 뭘까. 종종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회사 일이 많은 날에 특히 그랬다. 때로는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 한 번 해보고 싶은 날도 있었다. 두둑한 뱃살을 고무줄 바지에 숨긴 내 모습은 집에 두고, 머리 손질도 하고 입술도 좀 짙게 바르고 정장 차림으로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이고 싶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출퇴근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느슨함이 너무 좋은데. 할 수만 있다면 환갑까지 이렇게 일하고 싶은데. 그건 또 가능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