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길 위의 피아노 맨

by 혜솔

올해 들어 프라하에서 생활한 지 5개월이 되었다. 아기자기한 도심 속보다는 나무가 빽빽한 숲이라든가 넓게 펼쳐진 초원이나 정원을 더 좋아하기에 그동안은 주변의 공원을 자주 찾아다녔다.

한국에서 아들 요한이 왔다. 오랜만에 여행 중인 요한과 프라하 시내에 나갔다. 젊은이들에겐 역시 시끌벅적한 도심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볼거리며 즐길거리, 먹거리까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요한을 데리고 프라하 국립극장 앞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공연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고 보여줄 것이 있어서였다. 국립극장 건물과 건물 사이,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에 낡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다. 물론 장식품이 아닌 연주용이다. 누구나 사용 가능하기에 그 피아노를 치고 있는 동안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다.


요한, 신청곡이 있어, 꼭 들려줘야 해!
노래까지 불러주면 더 좋고...

처음엔 멋쩍어하던 요한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어떤 연주가 시작될지 궁금해 발길을 멈추고 서성이기도 한다. 나의 신청곡은 '내가 만일'이었다.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 '내가 만일'을 요한은 가끔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불러주곤 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본다. 어이없는 웃음을 띄는 요한, 누르는 건반마다 그저 나무토막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둔탁한 느낌의 소리... 어쩌다 소리가 난다 싶어도 음이 연결되지 않는 제각각의 소리가 흩어지고 만다. 아, 민망해! 프라하의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보여주겠다고 온갖 서설을 풀어놓으며 걸어온 거리가 깔깔대는 듯하다.




낡을대로 낡은 피아노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순간이 행복할 따름이기에.


지난봄, 우연히 이곳을 지날 때 무척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육중한 건물의 처마 밑이긴 해도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피아노와 지나가던 여행객이 배낭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던 모습을 본 순간, 내가 정말 프라하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시내에 나올 때면 으레 이곳에 들러(집으로 가는 트램 정류장 앞이라 ) 거리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나를 위한 연주는 불가능한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용자가 다양한만큼 이 피아노는 더 낡아갈 텐데...

"소리 나지 않는 건반은 무시하고 그냥 정상이라 생각하고 연주하면 안 될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름답기만 하더라"

아쉬워하는 나를 위해 요한은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그만! 거기까지만... 충분히 행복해, 그만해도 돼."

나지막하고 매끄럽게 울리는 요한의 목소리가 피아노 건반 소리를 눌러 버렸다고 할까, 듬성듬성 이 빠진 피아노의 코드가 노랫소리를 한 대 쳤다고 할까, 둘 다 안타까웠다.

거리 공연을 한 번 펼쳐주고 싶었는데, 피아니스트는 아니어도 거리의 가수로는 주목을 받아볼까 했는데 꿈이 야무졌나 보다. 그래도 나름 좋은 시간이 되었음에 감사한다.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준 요한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추억이 되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