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이 생의 마감은 장렬했다
산촌 생활을 시작한 첫해의 가을이었다. 볕이 유난히 따뜻했던 오후, 거실의 정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집은 빛의 흐름이 강렬해서 낮에는 난방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해가 질 무렵이면 가벼운 바람에도 한기가 느껴지니 산속의 가을은 빠르게 깊어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창을 통해 내다보는 하늘과 산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산속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뿌듯해하던 어느 날, 넓은 거실 창에 작은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움직임이 모여 덩어리지는 수상한 모습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무리는 대대적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통나무 벽 사이에서 더듬더듬 기어 나오는 그것들은 다름 아닌 무당벌레들이었다. 그들은 따뜻한 벽을 타고 내부로 들어와 창을 온통 뒤덮기 시작했다. 나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고 보니 징그럽다 못해 움찔, 소름이 돋았다. 무당벌레 수백 마리가 마치 전장에서 돌아오는 전사들처럼 줄을 지어 유리창을 타고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내 공간을 침입하는 자들이 생기는 걸까?
날씨가 쌀쌀해지니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오는 거라는 추측과 동시에 겨우내 이 녀석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드니 다시 한번 몸서리가 쳐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는 더 늘어갔다.
붕붕 날아 내 옷에 앉는 녀석도 있고 바닥에 떨어져 내 발에 밟히는 녀석도 있을 정도로 꾸역꾸역 기어들어 오는 놈들. 그것들을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가 무당벌레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무당벌레는 해로운 해충이 아니니 잡아 죽이지는 말라는 많은 사람들의 글귀도 보였다. 시기적으로 이맘때쯤이면 따뜻한 곳으로 기어들어 와 2세 작업을 끝내고 죽는다. 또는 보이지 않는 나무 틈새에서 무리 지어 동면하는 놈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집 나무기둥 틈새에는 이런 녀석들이 꽉 차 있다는 말인가.
통나무집에 대한 나의 환상은 이렇게 부서지고 마는 것일까.
밤이 깊어 거실에 나가보았지만, 여전히 녀석들은 창문을 뒤덮고 있었다. 아니, 창문이 아니라 창 벽이 맞다. 그 큰 유리 벽에 붙어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당벌레. 불을 켜니 불빛 가까이 날아들어 전등에 다닥다닥 붙는 놈들도 있어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모기약이라도 확 뿌려놓고 싹 쓸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해충이 아니라는데 더구나 약 뿌리고 쓸어버리는 크나큰 살생은 꺼림칙한 일이기도 했다. 안절부절,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자연과 함께 오래 살아오신 이웃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 이제야 네가 자연 속으로 들어와 자연과 함께 살고있는 거야"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다가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리창 아래 새까맣게 쏟아져 내린 그 장렬한 주검들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날지 못하는 그들을 나는 빗자루로 쓸어 풀숲에 뿌려주었다. 그렇게 하루 동안 죽어간 녀석들은 그날 밤새 유리창에 붙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한 사흘 그렇게 무당벌레들은 내 집 거실 창을 찾아 들어왔지만, 그 수는 반씩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모습으로 창 밑에 떨어져 있는 녀석들의 수가 확연하게 줄어들 즈음 기온은 뚝 떨어지고 산속의 가을은 겨울을 향해 속력을 내고 있었다.
자연에서 산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감아 안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것일까.
그 가을의 첫 모습을 떠올리면 신비로울 만큼 신선한 곳에서 내가 살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도시에 살면서 상상도 못 했던 광경, 무당벌레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다시 가을을 맞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이번 가을은 모두에게 힘겨운 가을이 될 것 같다, 가을에 봄꽃이 피는 것도 외부의 시련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쏟은 결과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의 힘겨움을 딛고 일어서 자연스레 예전의 가을로, 예전의 봄으로 웃으며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