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이야기
오래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내 앞날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골몰하던 때였었다. 대학을 꼭 가야만 하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날들이었다. 아마도 그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던 것 같다.
잠을 못 자 날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친구들은 여기저기 입학원서를 내고 분주하게 지내고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음악만 틀어놓고 뒹굴 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동생을 따라 무심코 교회를 가게 되었다. 여고생이었던 동생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모습은 반듯한 모범생처럼 보였다. 동생의 옆에 가만히 앉아 기도 하면서 나도 종교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며칠을 사촌동생을 따라 새벽 기도에 나갔다. 그냥 그렇게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했었다.
일요일 아침, 동생이 교회에 가자고 왔었고 그날도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얼마쯤 걸어가다 무엇인가 발끝에 차이는 것이 있었다. 주워보니 십자가가 달려있는 가늘고 긴 구슬 목걸이였다. 목에 걸기엔 뭔가 어색해 보이는 그것이 묵주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지난여름, 산길을 걸으며 묵주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해발 700 고지에서 800 고지를 향해 걷는 그 길은 한적하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며 집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오르는 동안 묵주기도 10단을 할 수 있는 길이었다. 덥지 않은 아침시간에 출발하여 정상까지 걸으며 기도를 했다. 걷다가 무덤 앞을 지나게 되면 그곳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했고 부스럭 거리며 숲으로 뛰어들던 고라니를 만나면 그 숲의 주인공을 위해 기도를 했다. 어떠한 청원의 기도나 목적을 위한 기도가 아닌, 묵주 알을 한알 한 알 돌리면서 한발 한발 걷는 그 순간이 모두 감사한 기도였다. 산골에 살면서 행복한 날들에 감사하며 순례하듯 길 위에서 올리는 기도의 시간이 달콤하고 설레었다. 묵주를 길에서 주웠던 삼십몇 년 전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시간이기도 했다. 가을까지 이어진 묵주 기도의 길은 생활 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는 생각들을 말끔하게 정리해 주는 치유의 길이기도 했다.
처음 묵주를 주웠던 그때, 목걸이인 줄만 알았던 그것의 주인을 찾아주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의 생일날,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얼떨결에 선물이라며 그 목걸이를 내주었다. 친구는 그때 나에게 그 목걸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름도 생소한 묵주라는 것이다. 그 친구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내가 성당에 가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러야 했다. 생각해 보니 묵주는 하느님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못 찾고 우왕좌왕할 때 넌지시 건네준 나침반 같은 선물이었음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느꼈다. 또한 묵주 기도는 내가 한 번도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보낸 내 엄마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있음도 알았다. 앞으로도 내가 걸어야 할 길은 많이 남아있다. 걷는 동안 나는 늘 묵주를 들고 방향을 잃지 않도록 기도를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