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느 라발의 그림책 『나의 할머니에게』
이 책은 2024년에 열렸던 세계 도서전에 갔다가 만났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크레파스의 질감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손으로 문지른 듯한 색의 결이 화면 가득 번져 있었고, 그 위에 적힌 제목 『나의 할머니에게』가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 자리에서 책을 선택했다.
집으로 돌아와 손자와 함께 그림을 보았다. 짧은 글귀였지만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손자였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서도 읽어 달라고 졸랐다. 특히 할머니와 함께 산책하는 장면에서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하루와 그림 속 풍경이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느 라발의 그림은 크레파스의 질감을 닮았다. 파스텔 톤의 경계가 없는 선은 단정하고, 색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나무는 키가 크고, 사람은 작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 비례는 우연이 아니다. 이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 늙어가는 것, 다시 순환하는 것이다. 아이와 할머니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에서, 누가 보호자이고 누가 배움의 주체인지 쉽게 단정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는 봄에서 시작해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딸기, 아카시아꽃, 연못, 메뚜기, 사과나무, 라타투이. 계절은 늘 먹을거리와 손의 기억으로 남는다. 할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시간을 몸에 들이는 방식이다. 맨발로 풀밭에 앉아 먹는 한 입은, 자연과 삶의 경계를 지운다.
책 속의 아이는 계속 질문한다.
나무들도 주름살이 있어요?
새들은 어디로 가요?
그럼 아빠는요?
아이의 질문들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할머니도 대답을 서두르지 않는다.
"겨울이 없는 나라로 간단다."라는 말은 정보가 아니라, 살아가며 받아들이게 될 이해의 여백을 남긴다. 이 책이 어른에게 깊이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를 위한 그림책이지만, 사실은 어른이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는 책이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텐트’의 의미였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각자의 텐트 안에 있다고 하셨어.
할머니의 텐트 안에는 할머니의 보물들로 가득해
멀리서 온 것도 있고,
할머니가 직접 만든 것도 있지
겨울이 오고, 각자의 텐트 안에 필요한 것이 모두 들어 있다는 할머니의 말. 그 안에는 멀리서 온 물건도 있고, 할머니가 직접 만든 것도 있다. 삶은 그렇게 쌓인다는 사실을, 이 책은 설명하지 않고 차분하고 영롱한 컬러로 보여준다. 할머니가 그린 파랑새 한 마리, 그것은 엄마가 태어났을 때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오래된 그림 한 장이 세대를 건너 기억이 되는 순간을 함께 펼쳐 보이며 다시 봄을 맞는다.
『나의 할머니에게』는 죽음이나 상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순환을 보여준다. 꽃이 열매가 되고, 열매가 씨앗이 되고, 다시 나무가 되는 과정을.
"인생은 돌고 도는 거란다."라는 할머니의 말은 관찰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은 안온하다.
이 그림책을 덮고 나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긴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깊이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개미를 보고, 할머니는 시간을 보고, 그 사이에서 세상은 잠시 멈춘다.
이 책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이면서,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아이였던 시간이 지나,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도 이 세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 그림책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연결이 그려진 세계였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책 속에 들어가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편하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려진 그림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