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이 기억하는 곳

포르투/포르투갈

by 혜솔

모루정원에서


아침
젖은 풀 끝에 빛이 얇게 걸리고

난간 아래
도루강은 은박지처럼 접혔다 펴진다


강 건너 지붕들은

밤의 기운을 덜 털어낸 얼굴로
붉은 기와를 겹쳐 놓고

다리는 철의 뼈를 드러낸 채
두 언덕 사이를 오래 붙들고 있다


골목으로 내려오면
발목이 기억하는 비탈진 돌바닥
벽들은 햇빛을 조금 늦게 돌려주고

창문과 문 사이
빨래와 그늘과 말소리의 얇은 결이
천천히 하루를 마르게 한다


저녁
살구빛이 강물 위로 천천히 번지고
포르투와 가이아의 지붕들이
서로를 끌어안는다

빛은 차츰 사라지고

남는 것은 타박타박

나에게 스며드는 발걸음 소리



처음의 가이아는 지도에 찍힌 이름들이었다. 모루정원, 페레이라, 강변, 다리. 어디를 먼저 갈지 고르는 장소들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이름들은 명소가 아니라 동네의 리듬이 되었다. 여행이 깊어지는 순간은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보다, 같은 길에서 더 이상 지도를 꺼내지 않을 때 찾아온다.

내 하루는 자주 모루정원에서 시작되었다. 아침에 정원으로 올라가 도루강을 내려다보는 일. 강은 늘 흐르지만 같은 얼굴로 흐르지 않았고, 강 건너 포르투의 지붕들은 빛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였다. 나는 벤치에 앉아 오늘의 속도를 정했다. 많은 곳을 걸을지보다 어떤 곳을 걸을지를 먼저 정하는 아침이었다.


페레이라 와이너리 앞은 매일 지나치는 길목이었다. 처음에는 ‘유명한 곳’이었고, 나중에는 그냥 내가 지나가는 자리였다.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가까운 곳은 그렇게 바뀌어 간다. 관광의 대상이었다가, 어느새 일상의 풍경이 된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그렇게 안도감이 될 때가 있다.


어느 오전, 가이아 골목으로 들어가기 위해 와이너리 근처를 걷고 있었다. 큰 길가에 관광버스 한 대가 멈췄다. 귀에 익은 소리들이 근처 와이너리로 들어가고,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로 돌아와 기사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기사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곧 할머니가 뒤 따라와 물을 하나 더 찾았고, 말은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포르투갈의 나이가 지긋한 기사는 영어를 몰랐다. 나는 지나가려다 멈춰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말했다. “Por favor, dois água.”(물 두 개 주세요) 그제야 기사가 “아하” 하고 웃으며 물 두 병을 꺼냈다. 두 분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려갔다.

아주 작은 일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고 그들은 나의 고장으로 놀러 온 방문객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르투에 정이 들려나 보다. 예전에 브라질에 머물던 시간이 쌓여 한동안 브라질 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브라질의 냄새가 그리워서 지도를 펼쳐놓고 눈물을 그렁그렁 한 적도 있었다. 이제 곧 포르투갈, 포르투가 그리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여행자였다가 잠깐 이곳의 동네 사람이 된 기분은 나를 더욱더 느긋하게 했다. 길을 안다는 건 방향을 아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한마디 건넬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루의 끝에 숙소로 들어서면, 열쇠를 건네던 직원들이 어느새 내 얼굴을 먼저 알아보고 밝게 인사했다.

“보아 노이치(Boa noite)”

"보아 노이치!


아침에 산책하러 나설 때 옆 방을 청소하던 리타가 다가왔다.

“봉지아(Bom dia)”

" 봉지아! 쓰레기통만 비워줘요." 부탁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언제 체크아웃하느냐고 리타가 물었다. 이틀 뒤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말은 짧았지만, 그 짧음 안에는 머무름의 시간이 들어 있다. 여행지에서 이런 안부를 주고받게 되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잠만 자는 숙소가 아니라 하루를 여닫는 자리, 잠깐 내 일상이 머무는 집처럼 느껴진다. 내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쓰레기통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고 화장대 위에는 아주 작은 아줄레주 타일 기념품이 놓여 있었다. 리타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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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 강변과 리타가 준 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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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되어 버린 그 곳, 골목과 도루 강변을 끼고 있는 포르투와 가이아


하루의 끝도 다시 모루정원으로 올라갈 때가 많았다. 아침에 강을 내려다보던 자리에서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도루강 위로 빛이 기울고, 포르투와 가이아의 지붕들이 잠깐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침에는 하루를 열기 위해, 저녁에는 하루를 접기 위해 같은 자리에 올랐다. 같은 자리였지만 마음은 늘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서의 열흘은 리스본에서의 열흘보다 길었다.

반복되는 발걸음은 낯선 곳을 익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 멀리 가지도 않았고 더 많이 먹지도 않았고 더 많은 것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내 발걸음이 기억하는 곳, 그곳이 마음 편한 나의 휴식처일 테니까.


돌아보면 포르투에서 내가 얻은 것은 새로운 풍경 하나가 아니었다. 명소가 동네가 되는 감각, 낯선 길이 내 걸음의 속도를 기억하게 되는 순간. 같은 길을 몇 번 지나치며, 나는 그 도시를 안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의 나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의 포르투갈 음악은 아주 절제된 보컬입니다.

Salvador Sobral 〈Amar Pelos Dois〉'둘 몫으로 사랑하기'

이 곡은 작고 낮은 목소리로 오래 남는 사랑의 무게를 말하는 곡이에요.

Salvador Sobral 〈Amar Pelos Dois〉

가이아의 저녁빛에는 〈Amar Pelos Dois〉 같은 노래가 잘 어울렸어요. 화려하지 않고, 크게 설명하지 않고, 다만 천천히 남는 곳, 포르투와 가이아가 그랬듯이. 반면, 공원에서의 버스킹은 신나고 흥겨운 곡들이 많이 울려 퍼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