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 입구에서 내렸다. 휴일엔 언제나 여행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거리로 나선다.
가지런히 짜인 돌길을 걷다 보면 가슴이 설렌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발자국을 뗄 때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설레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계획 없이 걷는 여정으로는 프라하성에서부터 바츨라프 광장까지가 무난하다.
계획하지 않고 걸으니 발걸음은 가볍고 동행이 없어 마음마저 부담 없다. 그래,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
돌길이 주는 안정감,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중세도시로의 여행이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 빨간 지붕과 교회의 첨탑, 그리고 푸른 숲이 만들어 놓은 그림 속을 걷는 기분이다. 그런 프라하의 오후를 이고 프라하 성 앞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대개 돌을 박아 만든 길이다. 한 돌, 한 돌, 사각의 돌들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따뜻하다. 작은 조각돌이 모여 십자가의 길이 되고 그 길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 자기 성찰의 길이 되기도 한다.
돌길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담아낸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발걸음에 닳고 닳아 매끄러우면서도 미세한 울퉁불퉁함을 간직하고 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마치 과거의 속삭임을 듣는 느낌이 든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양옆으로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돌길 위로 햇살이 비치면, 돌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이끼들이 은은한 녹색의 빛을 발한다. 또한 발걸음마다 역사의 숨결이 전해져 오는 듯한 묘한 감흥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산책하는 마음으로 걷고 있지만 감정은 단순한 산책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고요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해 두고 싶다.
바라만 봐도 참 좋다, 젊음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멈춰 선 곳엔 또 다른 설렘이 머물고 있다. 저 높고 넓은 곳을 향하여 가슴을 활짝 열어보자. 세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공감되는 것들을 나누며 함께 걸어보자.
구름이 낮게 내려와 감싼다. 하늘이 유난히 파란 건 오늘 내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은 아닐까. 성벽 낮은 담장 위에 앉아 멀리 성 밖 세상을 내려다보는 젊은이들은 만난다. 그 여유로움이 나는 부럽다. 젊음은 이래도 예쁘고 저래도 멋있다.
내 젊은 날은 어떻게 간직되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우물 안 개구리로 열심히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젊다는 무기로 늘 미래를 꿈꾸며 우물을 벗어날 준비를 해 왔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들, 포기해야 했던 열정들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고 있지만 나는 깨닫는다. 내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젊음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을, 그래서 나는 아직 젊다는 느낌으로 오늘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저 사람들, 말없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까를교를 건너기 전 어느 상가 앞에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을 본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는다.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긋이... 공중에 떠 있는 저 사람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무엇을 알리려 말없이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대나무 봉을 잡고 돌길 위에 앉은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눈앞의 광경이 신비롭기까지 하면서도 나는 저들의 마음을 읽고 싶었나 보다. 좀처럼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거리는 행위예술가들의 퍼포먼스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듯했다. 공중에 떠 있는 저 사람은 뭐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트릭일까?'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에 띤 평온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런 의심들은 서서히 녹아내린다.
우리는 종종 현실이라 믿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법칙들은 그저 우리의 제한된 인식의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단순한 퍼포먼스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잠시 멈추게 하고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예술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게 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트릭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경이로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질문들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힘이 아닐는지.
인간의 가슴 깊숙한 곳에 고여있는 슬픔 또는 어둠 같은 것들을
아름답게 끌어올리는 선율이 거리에 입혀진다.
길을 걷다가 쉬어 갈 곳을 찾는다. 둘러보면 곳곳에 앉을만한 곳은 많이 있다. 심오한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 다가간 곳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연주를 하고 있다. 시크릿가든의 세레나데, 녹턴, 표정도 분위기도 딱 그 음악과 어울린다. 인간의 가슴 깊숙한 곳에 고여있는 슬픔 또는 어둠 같은 것들을 아름답게 끌어올리는 선률이 거리에 입혀진다. 맞은편 벤치에 앉아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감상을 하며 쉴 수 있었다. 이 도시는 이렇게 내게 쉬어 갈 여유를 마련해 주는구나. 감사한 마음으로 동전하나 살며시 놓아두고 자리를 뜬다.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돌고 또 돌고...
관광객이 많은 구시가 광장을 벗어나려면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서면 된다. 좌 우로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며 또 다른 세상이 나온다. 재미있는 기념품 샾, 카페, 식당, 향기가 있는 집, 그리고 또 다른 대로로 이어지는 길... 그러다 잘못 들어간 골목길에서 돌아 나오다 보면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제자리에 서게 되기도 한다.
골목마다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나와 이 하루가 잘 어우러지고 있는 느낌이다. 여행지에서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함께 슬그머니 우리가 되어 본다.
고양이 샾 앞에서 생각난 나의 루!
고양이가 그려진 작은 컵과 메모지 등을 보면서 한국의 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루'(나의 고양이)가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의외로 고양이 그림이 많은 프라하다. 고양이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많다. 엽서 크기의 그림 한 장을 샀다. 내 옆엔 이제 루가 함께 있는 거라는 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동요를 부르고 싶은 바람이 분다. 발바닥이 조금 아프다. 그러나 마음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다. 하루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던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하루를 살아낸다는 의미로 결론지어졌다. 어떻게든 살아낸 하루는 결국 사라지고 그 하루의 추억으로 또 다른 하루를 버텨 내는 것이라는 걸 늦게 알았다. 지금 그 하루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강물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