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묘지

음산하기보다는 평화롭기 그지 없는..

by 혜솔

밤새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이 유난히 푸른 이유다.

한 올의 빛이 길어 올린 어둠은 여전히 푸름속에 잠들어 있지만 길이 맑아서 좋다.

나도 맑아질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휴일 아침이다.

몸이 가는 곳이 마음도 가는 곳일까.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마르케다 수도원 묘지 앞을 지나고 있었다.

무의식의 산책 속에 책 한 권쯤 묶어 낼 사유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그리움이라 해두고 싶다.


그리움의 얼룩은 시간의 무늬로 남겨지고 나는 그 시간을 거리에 풀어
사유를 만들면 된다.

묘지 안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얼룩져있을 듯했다. 작은 풀꽃부터 커다란 조화까지 한데 어우러져 망자들의 마을을 가꾸어 놓은 듯 환 하다.

묘비에 새겨진 짧은 글귀처럼 이들의 생도 간결하였을까. 생년월일과 이름이 새겨진 묘비의 모양도 다양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를 떠올리며 천천히 묘비와 묘비 사이를 걸어본다.

음산한 프라하의 공동묘지에 모인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이야기를 날조하고 위서를 만들어내는 주인공. 소설 속 인물 시모니니가 바라본 세계를 나는 보지 못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안의 우리들, 정작 접하고 있는 것이 진실된 정보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시모니니 같은 사람을 본 적도 없다. 어쩌면 소설 속 세상이 현실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 존재하는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인간세상의 역사에 나는 관심 가져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


묘지 안의 주검들은 말이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 휩싸였을 어떤 음모나 억울함에도 또는 살아있는 동안에 행해왔을 거짓이나 위선에도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의 눈에 보이는 평화롭고 아늑하기까지 한 묘지 안의 주인공들일뿐이다.

물조리를 들고 지나가는 여인의 뒤를 가만히 따라가 본다. 여인은 어느 묘비 앞에 심어놓은 작은 장미나무에 물을 준다. 그런 모습이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웃옷을 벗어 묘비 앞에 펼쳐놓고 앉아있다.

여인은 무어라 혼잣말을 하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읽어버린 것만 같다. 나는 멀찌감치서 여인을 바라보며 노트에 끄적여 본다.


그녀가 일어서자 캐머마일 향기가 흩어진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고요한 묘지 정원엔 촛불이 꺼지지 않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곳곳에 서 있습니다.


나지막한 울림, 망자들을 향한 독백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야 할 어디쯤을 말하는 것인가, 주변이 엄숙하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어떤 이름 앞에 앉아

한 겹씩 옷을 벗는 그녀의 몸짓, 속살이 파랗다.

수도원 묘지 안의 나무들은 술렁대고 파란 알몸은

검은 묘비 위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오른다.

이곳과 저곳의 시차는 얼마쯤 되는 걸까

합장한 기도 손에서 향기가 난다.

관능적인 향의 연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는 순간,

나는 본 것 같다.

원생림의 깊은 숲 속을 떠돌다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그를……

적막의 현기증이 일렁인다. 몇 겹의 허물을 벗는 소리

주황 부리 검은 새 떼의 날갯짓

붉은 노을이 떨어지며 파랑을 삼키는 빛깔

춤추는 그들을 에워싸고 나는 그만 블랙홀로 빠져든다.

아득하다.


그녀와 그 사이에 달개비꽃이 피었다.

묘비 위에 벗어놓은 그녀의 옷에선 여전히

캐머마일 향기가 새어 나오고

나는 아직, 꿈에서 깨지 않는다.


내가 오늘을 사는 동안 내일을 걷고 있는 너

머나먼 그 간격과 속도의 공간에도

꽃은

파랗게 피었겠다.

<졸 시 '프라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