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 냄새에 빠지고 싶은 가을

프라하 시립도서관에서

by 혜솔

월요일, 도서관으로 향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글도 쓰고 체코의 문학서적을 구경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책 냄새가 좋아서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월요일이 휴관일인데 이곳은 일요일이 휴관이고 월요일은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오픈한다. 다행히도 내가 쉬는 날이 월요일이기에 주로 도서관을 찾을 때가 많다.

제법 날이 선선해졌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바람도 분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도서관 문밖을 서성이며 오픈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줄을 서 있던 몇몇 사람들, 문을 열자마자 각자 선호하는 자리를 향해 분주하게들 걷는다. 나도 늘 앉았던 그 자리를 향해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조심스레 밟았다. 2층엔 주로 문학서적이 진열되어 있고 특히 내가 앉는 자리 앞에는 소설책과 시집이 꽂혀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시집 코너를 둘러보다가 릴케의 이름을 발견하고 집어 든 책은 '두이노의 비가'였다. 체코어로 된 책이라 체코어를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내용은 좀 알고 있으니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할 때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리포트한 적이 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도 많았지만(시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아마도 삶과 죽음에 대한 대립이나 일치를 노래한 릴케의 시가 슬픔보다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삶이나 죽음을 초월한 전일의 세계에 두고 있다는 크나큰 테마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체코어판 '두이노의 비가'를 들척이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가는 나를 흔든 건 창밖의 바람소리였다. 비와 함께 가을을 몰고 오는 바람은 한국의 따뜻한 방바닥을 그립게 하고 내가 살던 산골 마을의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사무치게도 한다. 그 가을 냄새를 도서관의 책 냄새로 대신해본다.


열람실이 따로 있지 않고 서고와 함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서고의 책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책 표지의 이미지나 책의 크기가 두드러지지 않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문학서적들이야 두껍거나 크지는 않아도 눈에 띄는 이미지 컷이 많음직한데 단색에 수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 고양이 사진이 있는 책이다. 작가의 이름이 James Bowen, 체코의 작가는 아닌듯하다. 검색해 보니 영국의 도서관 협회가 선정한 반드시 읽어야 할 문학작품으로 소개된 '상처받은 고양이 Bob의 이야기'를 쓴 영국의 작가였다. 한국에서 번역된 책 제목은 ' 내 어깨 위의 고양이 Bob'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내가 집어 든 책이니 아무리 모르는 체코어지만 몇 줄은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을 해 보았다. 상처받은 길냥이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희망을 잃고 살던 저자와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실화라는 것도 알았다. 고양이와 인간의 우정을 통해 마음을 치유해 나간다는 따뜻한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저자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다졌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유명한 책을 한국에서 본 적이 없었을까. 내 안에 갇혀, 내 글에 갇혀 두리번거리기 조차 할 수 없었던 날들이 스쳐간다. 무엇이 나를 좁은 구석으로 몰아 부치고 쫓아댔었던 걸까.

계단을 오르면 문학서적이 진열되어 있고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좌석이 있다.

볼수록 정감 있게 생긴 고양이 Bob, 내가 떠나보낸 내 친구 써니와 달과, 루를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오늘 도서관 나들이는 James Bowen의 고양이 Bob을 만난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모르는 언어의 책일지언정 이 가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