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난 포기와 회복이 빠른 사람이다. 첫 병원 방문 후, 난임 전문병원에서 연락이 오기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리기에 내 성격은 너무 불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은 잊고 있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클리닉 마지막 방문 이후 모든 걸 내려놓았다. 맘카페도 일절 들어가지 않고, 임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졌다. 내 생각에 내 생리 주기는 다시 길어지고 있었고, 빨라봤자 다음 생리는 8월 중순이었다. 때마침 7월 중순부터 알버타는 그 어떤 곳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맑은 날의 레이크루이스를 남편에게도 보여주고 싶어!'라는 열정 하나로 시작된 하이킹이 매주 1~2회씩 이어지게 되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 치고는 등산을 굉장히 꺼렸다. 왜냐면 등산 다녀올 때마다 아팠기 때문에. 예전에 한 번 같이 등산을 시도한 친구는 고도가 높아지는 족족 새하얗게 질려가는 내 피부에 놀랄 정도였고, 이상하게 꼭 등산에 다녀오고 나면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캘거리에 살기 위해서는 자연 속 활동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등산을, 내년에는 자전거를, 내후년에는 캠핑을! 이렇게 조금씩 캘거리 여름에 녹아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등산하러 다녀오면 하루 이틀은 골골댔고, 모기 때문에 며칠을 시달렸지만 그래도 왠지 삶을 알차게 사는 듯한 기분에 흠뻑 취해있던 여름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내가 예상한 다음 생리는 8월 중순이었다. 그래서 배테기는 편한 마음으로 7월 말부터 다시 시작했다. 크게 기대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뭐 캐나다에 온 뒤로는 2019년에 다닌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6개월 외에는 생리도 잘 해왔고, 지금 전혀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으니 최소 3개월 내에는 또 반응이 오겠지라는 마음이었다. 진심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생리가 시작한 지 한 달 쯤 지난 7월 31일부터 배테기 수치가 올라갔다. 지난번 사이클에서는 높게 올라가봤자 1.0이었는데, 1.25, 1.39, 1.73까지 쭉쭉 올라갔다. 와 이 수치는 진짜다! 어마어마한 TMI겠지만 뭐 삼십 대 부부의 임신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안 할 수도 없으니 그냥 말한다. 정말 열심히 달렸다. 남편은 아침부터 풀타임으로 일하고, 나는 저녁 시간에 일하느라 피곤한 상황에서도 영혼까지 끌어올렸다.
피크 시기가 꽤 길었다. 아마존으로 구입내역에 들어가 같은 배테기 상품의 수많은 리뷰를 살펴보아도, 구글로 Ovulation Test를 검색해보아도, 맘카페에서 배테기를 찾아보아도 나흘을 넘게 피크를 찍는 경우는 없었다. 이상하게 나만 일주일이 지나도 계속 피크였다. 테스트 라인이 엄청 진했다. 육안상 2.0은 넘어서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하루는 대만인 코워커와 데이트를 했다. 8월 6일 오후 1시쯤이었나, 코워커를 집까지 데리러 가서, 마르다루프도 데려갔다가, 헤리티지파크도 구경하러 갔다가, 서로 캐나다 와서 처음으로 외국인 친구와 노는 거라 긴장도 많이 했다. 둘이 다른 점도 되게 많은데 걷기를 좋아하는 건 잘 맞아서 둘이서 15,000보를 걸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리고 같이 매장으로 갔다가 나는 저녁 시프트로 일을 시작했고 그 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 피곤했다. 이상하게 목이 계속 말랐다.
그날 매장에 어떤 부부가 유아차를 끌고 들어왔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제조 중이었다. 유아차에 타고 있던 아가가 고막이 찢어져라 울어댔다. 안그래도 피곤한데 남의 아기가 우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짜증이 확 솟구쳤다. 티도 내지 않았고 우는 아이를 이해는 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난 아직 안 되겠다. 애기 우는 소리가 이렇게 짜증 나다니, 난 아직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밤 10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도 목이 계속 말랐다. 친구에게 밤에 '나 아직도 목말라. 재밌게 놀았는데 생각보다 피곤하다.' (돌이켜보니 조금 무례했나)했더니 그 친구한테도 '나도 너랑 헤어지고 1리터짜리 음료 한 번에 다 마셨어'라고 답장이 왔다. 그래서 난 우리가 그냥 긴장도 많이 하고 걷기도 많이 걷고 대화도 많이 해서 피곤한가 보다 생각했다.
진짜 피곤했다. 제발 배테기 결과가 낮게 나오기를 바랐다. 왜냐면 너무 피곤했다. 남편도 피곤해 보였다. 진짜 그냥 침대에 들어가자마자 잠들고 싶었다. 그런데 역대급으로 높은 수치가 나온 거다. 피크 8일째인데! 8일째인데!!! 화가 났다. 왜 임신 준비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의무가 되면 재미는 줄어드는 법..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맘카페에서 '임테기가 없어서 배테기로 임신을 확인했다'라는 글을 봤던 기억이 났다. 뭔 헛소린가 하고 제대로 읽지 않고 지나쳤는데, 아무튼 그런 경우도 있다는 것 아닌가? 설마? 정말 설마 하는 마음에 임테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정말이지 임신테스트기를 가동시킨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슬로우모션으로 기억난다. 3분을 기다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닿자마자, 적셔지자마자 바로 선명하게 두 줄이 보였다.
놀랐지만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첫 소변으로 또 했다. 다다음날 또 했다. 계속했다. 계속 두 줄이었다.
결론적으로 배테기의 도움 없이, 병원으로부터도 아무런 도움 없이 두 달 차에 임신이 되었다. (놀랍게도 이때까지도 난임전문병원의 연락은 없었다.) 황급히 어플로 계산해보니 5주쯤 된 것 같았다. 되려 지난달에는 아랫배도 콕콕 쑤시고 나른한 나름의 가짜증상에 취해있었는데, 정작 진짜 임신했을 땐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블로그로 급하게 지난날들을 돌이켜봤다. 드문드문 술도 마셨다. 맥주도 마시고 양주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종류별로 잘도 마셔댔다. 하이킹도 진짜 많이 다녔다. 몸을 제대로 혹사시켰구만. 그 와중에 열심히 살아있어 준 아기에게 감사했다. 임신 확인 일주일 전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복통에 반나절을 고통스러워했다는 일기를 블로그에 남겨놨었다. 아, 그게 착상통이었나보다. 그제야 알았다.
남편에게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방학에 하던 풀타임 잡을 다음 주에 그만두기로 했는데, 분명히 지금 말했다가는 부담감에 그만두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일주일만 기다렸다가 남편이 그만둔 다음 날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 주말에는 약속해뒀던 하이킹도 또 다녀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어서 태아가 걱정되었지만, 아직 나만 아는 사실이니까…. 라는 무책임한 생각도 조금 했다. 다행히 그날 그 마지막 하이킹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너무 아쉬웠겠다 싶을 정도로 정말 좋은 추억이 되어주었다.
혼자 다시 클리닉에 다녀왔다. 예약하면서 '임신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도착하자마자 소변검사부터 시작했다. 소변 샘플을 제출하고 진찰실에 앉아있었다. 뭐, 대단한 것도 없었다. 의사가 진찰실에 들어오더니 "임신했네."라고 했다. 아이고 시크해라. 낭만도 없네. 근데 나도 꺄흥흥 하며 감정을 표출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런가 봐."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6주쯤에도 병원 가면 피검사도 해주고, 질 초음파도 해주고 또 그런다던데, 그런 거 일절 없다. 그냥 소변검사뿐이다. 피검사를 하려면 또 피검사만 하는 곳에 따로 가서 50분 기다렸다가 피 뽑고 며칠 뒤에 다시 클리닉 가서 검사 결과 들어야겠지. 아이고 귀찮아라. 그냥 의사도 8주 차쯤에 초음파 보고 11주 차쯤에 다운 검사용 피검사 받으면 된다며 Requisition만 잔뜩 프린트해줬다. (정확히는 12주 차에 있을 초음파 검사날의 최소 3일 전까지는 피검사를 받아야한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대충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바로 초음파 예약을 했다. 8주 6일 차로 예측되었던 8월 31일로.
8월 14일, 남편의 썸머 풀타임잡이 끝난 다음 날,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분주히 서프라이즈 준비를 했다.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크리스티나가 "넌 화장실에 앉아서 막대기 보고 알았는데, 왜 네 남편은 특별하게 알아야 해?"라고 했던 대사가 생각나서 조금 서글퍼졌지만, 난 워낙 서프라이즈 하는 걸 좋아하니까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 상자도 사고, 육아서적도 사고, 차에 붙일 것도 사고, 카드도 쓰고, 애기옷도 사서 숨겨놨다. 특식으로 Beef Bourguignon을 내놓기 위해 서프라이즈 전날 밤에 미리 고기도 재워놓고, 정성껏 요리하고, 오래 묵혀놨던 액션캠도 몰래 설치해놓고 짜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방방 뛰어서 순간 내가 카메라 숨겨둔 걸 눈치채고 연기하는 건 줄 알고 놀랐다. 아무튼 서프라이즈는 성공적이었다.
그 주 주말에는 재스퍼에 다녀왔다. 미리 계획해 둔 여행이었지만, 임신 축하 여행이 되어버렸다. 아직 몸이 말짱한 걸 보니 나는 입덧 없이 지나가려나보다 하하하! 하며. 아주 큰 착각을 하며. 짧디짧았던 착각 속 마지막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는 힘든 하이킹도 몇 군데 들르려고 했는데, 클리닉에서 의사가 '높이 올라가는 행위'를 하지 말라기에 참았다. 운전도 내가 더 많이 했다. 음식도 아무거나 잘 먹었다.
짧고 굵었던 1박 2일의 재스퍼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다음 날 지옥의 입덧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