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칠순 선물
일상의 전쟁
“엄마, 어제 세탁기 안 돌렸어? 검은 바지가 없네.”
“이 바지는 어때?”
“아니, 됐어. 어이구. 에잇....” 하루의 시작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을 맞이한다. 이날은 바지가 이슈였다.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 모모가 책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간다.
이 상황을 모두 바라보고 있던 나나가 옆으로 나가와 말을 건넨다.
“엄마, 괜찮아? 오빠가 엄마한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그러게 말이야. 엄마가 이럴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두근거려. 오빠가 찾는 바지가 없어서 속상했나 봐. 점점 좋아지겠지. 좋아질 거야....”
두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후 나에게 종종 찾아오는 감정이 있다. 먹먹하고, 조마조마하고, 억울한 감정이다. 남편처럼 회사에 출근하는 직업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과 육아가 한 덩어리로 융합되어 굴러가는 하루가 힘겨웠다. 모모가 던지는 감정의 화살을 맞고 시작하는 날이면 몸과 마음이 지하로 던져진다.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감정조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상황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도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 감정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무방비 상태로 놓이는 일이란, 내 인생을 한 발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게 만든다. 깊은 무력감이 훑고 간 자리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잘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ADHD의 증상을 알고 있다. 여러 번 되뇌어도 몸이 반응하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다음은 먹고사는 일에서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다. 월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생존을 위한 야근을 주 2~3회 이상 하는 남편의 하루가 안쓰럽지만, 연민의 마음이 오래가지 못하고 스치고 만다. 남편을 향했던 시선이 나의 일상으로 옮겨진다. 일과 육아에서 시소를 타듯,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는 나의 시간도 흘러간다. 안쓰러움이 흘러간다. 돌봄 영역에서 도움을 받고 싶은 애잔한 마음도 흘러간다. 모든 게 고이지 않고 흘러가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급발진 버튼과 칠순 선물
어디 이뿐인가. 나(우리 부부)를 한 번에 나쁜 년(놈)으로 만들어버리는 급발진 버튼이 있다. 아무도 원하는 사람은 없는데, 한 번 눌러지면 모든 걸 쓸어버리는 파급력이 대단하다. 올봄 어머님의 칠순 잔치가 있었다. 남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특별한 날을 맞이하시는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도 아니고, 인생에 주어진 크고 작은 과제를 하나씩 풀어가며 애쓰며 살아오신 어머님을 위한 날이다. 왜 이렇게 내 삶은 가난할까. 어쩌다 이렇게 살아왔나. 한없이 작고 초라해졌다. 어딘가로 훌쩍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결혼 12년 차 내 손으로 속옷 한 번 제대로 사 본 적 없다. 친정엄마가 사주시는 심리스 팬티 여러 장, 1년에 몇 번 살까 말까 한 다이소 무봉제 브래지어면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다. 얼굴에 바르는 영역까지 다이소가 스며들었다. 화장품 유튜버의 다이소 제품 소개 영상을 보고 구석구석 저가의 물건이 화장대에 채워졌다, 다이소에서 가장 비싼 크림 한 개가 5천 원을 넘지 않는다.
쿠션팩트, 립글로스, 메이크업 베이스, 색조화장품까지 모두 넣어도 3만 원 안에 가능하다. 합리적인 지출에 만족감을 만끽했다. 마음 편하게 쇼핑할 수 있는 국민 다이소가 있어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건 어디까지나 급발진 버튼이 작동되기 전까지였다.
퇴근 후 어쩐 일로 남편이 나에게 말을 건네러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저 자리에 몸을 고정시켰다는 것은 무게가 있는 주제다. 이미 내 뜻은 정해졌다는 불길한 예감을 알아차리고, 남편이 쓰는 수법을 똑같이 해줬어야 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엉덩이를 침대에 앉히지 말고 등을 보이며 안방을 박차고 나가는 태도를 나도 보여줘야 했다.
“저번에 엄마 칠순 있었잖아. 공기청정기 사드릴까 해.”
‘지금 뭐를 산다고?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도대체 얼마나 할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원래는 칠순 선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를 했는데, 어머님의 허리 디스크 증상으로 미뤄졌다. 남편의 대화 태도가 답답하다. 분명히 우리말을 쓰고 있는데 못 알아듣겠다. 생략된 언어가 많아서 거칠고 불친절하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성난 자동차와 같다.
“공기청정기를 산다고? 나랑 상의를 해야지.”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는 거잖아.”
“아니, 이건 대화가 아니라, 내 입장에서는 통보처럼 느껴져.”
“엄마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인 날인데, 그것도 못 해? 못마땅한 거네. 지금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나라고 안 하고 싶겠어? 그게 아니잖아. 내가 지금 기분이 상한 이유가 공기청정기를 사드린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이미 다 정해놓았잖아. 나랑 이야기를 하면서 조율할 수 있는 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안 좋아. 그리고 우리 형편에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공기청정기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인터넷에서 저렴한 것으로 알아봤어.”
“솔직하게 말하면 난 부담스러워. 그리고 당신은 ADHD에 대해서 처음 몇 번 만 알아보고, 지금 공기청정기를 알아보고 있을 때 야? 너무한 거 아니야? 나만 속 끓이면서 공부하고 있어. 이게 뭐야. 너무 서운해.”
“야, 너 진짜 대단하다. 난 상상을 못 했어. 엄마 칠순인데 그것도 못한다고? 어떻게 그래.”
“아니, 나는 공기청정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의견이 다르니까 대화로 풀어 보자고.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지금 응급 상황이 발생했잖아. 모모 ADHD 치료를 위해서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필요해. 모모의 소식을 어머님이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 공기청정기를 말씀하신 어머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려워. 아버님 생신 선물을 청바지 사달라고 말씀하셨다며? 며칠 후면 어버이날이야 그럼 그때는 뭐야?”
“그만두자. 너랑 할 말 없다.”
서로의 마음만 할퀴는 대화가 끝나버렸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방에 어머님을 느낀다.
어머님의 그림자가 방안을 가득히 채웠다. 분명히 같은 공간에서 살지 않는데, 함께 사는 사람보다 생생하게 느껴지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느 구석 하나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나에게는 보통의 사람처럼 칠순 상을 차려드리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거기다 남편을 불효자로 만들었으니, 내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안보였다.
남편의 입술에서 ‘H야, 고생한다. 모모가 키우느라 애썼어. ADHD라는 소리 듣고 많이 놀랐지? 힘들겠지만 엄마 칠순 때, 공기청정기 저렴한 거 해드릴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내가 바랬던 말과 아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나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다. 눈을 딱 감고, 시원하게 “그래, 공기청정기 해드리자.”라고 했을 테다. 그날 그렇게 공기청정기는 산산이 박살 났다.
남편은 보란 듯이 베개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하루는 나나의 방에서, 또 다른 날은 모모의 방에서 몸을 뉘었다. 쉽게 잠들지 못한 밤, 마음이 타들어 버린 밤, 가장 의지하고 싶은 사람에게 버려진 밤, 절망의 바닥에서 버틴 여러 밤이 지났다.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문신이 새겨진 눈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모모부터 살려야 한다. 더 일찍 ADHD를 알지 못한 미안함을 덜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