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엔 식지 않은 달걀프라이, 젖은 머리로 소파에 기대앉은 모모.
“모모야, 아침이야. 빵 먹고 학교 갈래? 밥 줄까?”
“에이, 몰라.”
잠에 빠져있는 아이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마음을 할퀸다. 어느 날은 순조롭게 아침을 시작하지만, 일주일에 2~3번 정도 짜증으로 하루를 마주한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말로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엄마가 지금 우울의 늪을 지나고 있어. 평소와는 다르게 언제 마음이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거든. 지금이 그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눈물을 삼켰다.
나의 뇌에 세로토닌 공급이 필요한 것처럼 모모도 그렇다. 서로 다른 몸을 가졌지만, 우리는 같은 결핍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나는 안다. 모모의 뇌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다는 걸. 감정을 다스리는 전전두엽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작은 말 한마디에도 폭풍이 인다.
특히 아침은 피로, 시간의 압박, 그리고 ‘잘 자던 상태에서 일상으로 전환’이라는 세 가지 변화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시간이다. 그 작은 변수가 아이에겐 과부하가 되어버린다. 준비물이 없다는 말 한마디, 양말을 신기 싫다는 사소한 행동이 폭풍처럼 번지는 이유다.
결국 이 폭발은 단순한 문제행동이 아니라, 뇌 속 ‘감정 브레이크’가 아직 작동되지 않은 신호일뿐이다. 아침의 혼란은 아이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조절 기능이 깨어날 시간을 조금 더 필요로 한다는 몸의 언어다.
우울의 파도와 ADHD가 합쳐진 집안 공기는, 우기와 건기를 오가는 날씨 같다.
아이의 특성을 안다 해도 날마다 새롭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과 함께 사는 기분이다. 어느 날은 조용하게 지나갈 때고 있고, 감정의 미사일이 사납게 퍼부어질 때가 있다.
“김모모, 너 지금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 엄마가 너한테 말한 것 중 하나라도 틀린 게 있어? 준비물 챙겨가라고 한 말에 왜 성질을 내는 거야? 네가 스스로 조절이 안된다는 게 이런 거야. 네가 통제가 되니?”
출근하려 신발을 신고 있던 남편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울려 퍼진다.
고맙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어색했다
평소엔 내 한숨에 무심하던 그가 오늘은 반응했다.
그런데 그 말이 정확했더라면, 나는 덜 외로웠을까.
‘너나 잘하세요. 함께 있어도 외롭게 살아온 지난 시간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아이의 ADHD를 이해하고 품는 일이란 날마다 모성을 의심하게 한다. 나를 작아지게 하고, 내 안에 어떤 사랑이 남아있을까 흔들린다.
어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내게 우울이 온 거다.
사랑은 때때로, 서로가 미처 조절하지 못한 부분을 조금씩 껴안아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며 끊임없이 사랑을 의심했다. 모모를 키우며 하루를 버텼지만, 사실 모모가 나를 살려낸 거였다.
그 사랑이 돌고 돌아, 결국 서로를 살아 있게 만든 거지.
마치 <아모스와 보리스>의 고래가 바다 밖으로 나와야 바다의 가치를 알 수 있듯, 우울의 시간 덕분에 나는 일상의 평범함이 얼마나 특별한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사랑하는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기적인지 깨달았다.
이제 나는 안다.
내 삶의 중심에는 모모와 나나, 그리고 나 자신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살아 있으며, 그 속에서 사랑은 매일 새롭게 살아난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의 상태를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