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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혼부 연예인과 결혼했다 19

내가 아플 때

by 장정윤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슬슬 아이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때까진 피임을 했는데 피임을 하지 않으면 금방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다. 임신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줄은 그때는 몰랐다. (아이를 가지려고 고군분투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한다. 너무 딥하게 흘러간 스토리이기에...) 일단 아이가 덜컥 생기기 전에 내 몸상태부터 살펴야 했다. 나는 산부인과에 가서 산전검사를 하고 풍진 주사를 맞았다. 검사 결과는 임신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난자 나이도 꽤 어렸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았다. 또 매년 받던 건강검진을 받으며 생애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에 도전했다. 그런데 거기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았다.


워낙 술과 고기를 좋아하니 용종 몇 개는 있으려니 짐작했다. 예상대로 용종은 3개가 나왔는데 두 개는 내시경 도중 떼어냈으나 한 개가 맹장 근처에 붙어있어 떼내지 못했다고 했다. 전날 밤 한숨도 못 자고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수면마취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비몽사몽인 상태로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대학병원에 가서 떼야한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대학병원 상담을 잡아주었다.


대학병원의 시스템은 정말 복잡하고 인내심이 필요했다. 예약한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고 시술 날짜를 정하기 위해 간호사실(?)로 보내졌는데 또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또 대장내시경 검사 하제를 받기 위해 병원 내 약국에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워낙 많은 환자를 돌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서도 이러다 없던 병도 생기겠다는 욱한 심정이 올라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날로부터 한 달 뒤 나는 맹장 근처에 자리 잡은 대장용종 떼는 시술을 받기로 했다. 출혈이 있을 수 있어 하루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입원을 할 땐 보호자가 동반해야 하며 보호자도 PCR 검사를 받아야 동행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먼저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는 많이 걱정하시며 PCR 검사도 받고 내가 입원한 하루 동안 함께 있어주겠노라 하셨다. 내가 승현에게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는 승현의 스케줄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한 달 뒤 스케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술 날이 다가오고 승현의 스케줄을 확인하니 스케줄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남편이 옆에 있는 것보단 엄마가 옆에 있는 게 훨씬 편하고 도움이 될 거 같았던 게 사실이지만... 70세가 다 된 엄마에게 나를 돌봐달라고 한다니 면목없고 또 엄마가 힘들까 봐 걱정이 되어서 승현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알려줬어야 하는데 난 또 미안한 마음에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 그날 병원에 보호자로 같이 가줄 수 있어?

- 그럼~ 그날 가서 하루 같이 있으면 돼?

- 응. 그런데 입원하기 3일 전에 PCR 검사를 받아야 해. 싫으면 괜찮아. 엄마가 같이 가주기로 했거든.

- 아... PCR 검사받는 건 좀...


그랬다. 동행은 해줄 수 있지만 번거롭게 보건소에서 기다렸다가 PCR 검사를 받는 건 싫었던 것이다. 그럼 70세 다 된 우리 엄마는...? 나는 그냥 그럼 다음 날 아침 퇴원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데리러나 오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냥 그 정도면 조금 서운한 마음이 해결될 거 같았다.


어쨌든 입원을 하고 시술을 받고 다음 날 아침, 엄마와 죽 한 그릇을 나눠먹으며 승현을 기다렸다. 집에서 내가 입원한 병원까진 차로 20분 남짓한 거리. 그런데 승현에게 전화가 왔다. 차가 시동이 안 걸린다는 것이다. 멀쩡하게 잘만 움직이던 차가 갑자기? 승현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난 정말 화가 났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 시간 동안 승현은 보험사에 전화하고 차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차 문제를 해결하자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말도 섞기 싫었다. 그런데 승현도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도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차가 고장 난 걸 어떻게 하냐고. 맞다. 승현은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다 알지만 화를 냈다. 마음속 서운함이 폭발해 그 조각들이 나를 긁어댔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라도 내 보호자로 따라와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삭히지 않는 분에 침실 문을 닫고 씩씩거리며 누워있었다. 그때 문자 하나를 받았다.


글쎄... 그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지만 유방암이 뇌전이 되어 투병 중이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한 번 못 갔다. 몇 달 전 연락했을 때만 해도 호전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친구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것이다. 친구에겐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난 가슴을 쥐어짜며 울부짖었다. 놀라 들어온 승현이 나를 안고 위로해주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친구를 이제 볼 수 없다는 것도 슬펐지만 가족을 두고 떠날 때 친구의 마음이 어땠을까... 편히 떠나지도 못하고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뗐을 거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장례식에서 만난 친구의 엄마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삼키다 끝내 엉엉 울어버렸다.


친구의 무거운 죽음은 많은 걸 상기시켰다. 엄마가, 아빠가 건강하셔 아직까지 내 보호자 역할을 해주실 수 있다는 것. 조금 어설프지만 그래도 사랑이 충만한 남편이 있다는 것. 거기에 든든한 오빠, 새언니, 뭘 해줘도 아깝지 않은 조카까지. 다들 나에게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빈 공간이 생기겠지만 그건 또 남은 서로가 메워주며 살면 되는 거니까. 친구의 가족도 온 힘을 다하여 친구의 빈자리를 메우며 잘 살아가겠지.


승현에게 훗날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떨 거 같냐고 물으니 집에 시신 그대로 안치해두고 싶다는 괴상한 대답을 했다. 그렇게나 날 사랑한다고? 말은 안 되지만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은 마음이 뭔지는 알 거 같다. 모자란 사람들끼리 만나 모자라게 굴면서도 옆에는 있고 싶은 거, 그게 천생연분 사랑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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