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학교에 가던 날, 세상은 신기하고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손을 들어 선생님에게 묻고 부모님에게 묻는다. 나에게 쓸데없는 질문이란 없었다. 나는 그게 궁금하니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칠판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열심히 받아 적는다. 선생님에게 질문을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쓸데없는 것 좀 묻지 마. 정신 안 차릴래?!" 나의 궁금증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런 거 궁금해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말이 따라온다. 하긴,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지 앞에서 나의 질문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군 입대 전 복학생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해준 조언은 "딱 중간만 해"였다. 그냥 조용히 시키는 대로 중간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조언(?)이 사회에서도 통용될 줄은.
정해진 정답과 정해져 있는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주변의 눈살이 따가워지고 비난을 받는다. 다른 말을 해봤자 정답이 아니니까, 틀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작아지는 것 같고 창피해진다. 나의 의견이나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은 상사에 대한 도전이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상한 녀석 취급을 받는다. 더 이상 다수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굳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이런 과정을 거쳐-질문을 하는 게 어색해지며 질문을 받는 것도 어색한 세상을 살게 된 건 아닐까. 질문은 없고 지시와 주문만 있는 그런 삶.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되어갈수록 궁금해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다. 해야 할 역할의 가짓수가 늘어나니 '이해'를 기다려줄 여유는 없다. 그래서 나를 향한 관심과 위로, 인정, 존중에 조금은 목말라하는 것 같다. 1초에도 수십, 수백의 게시물이 업로드되는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더 많은 엄지와 하트를 받기 위해 더 빠르게 움직일 뿐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또 어떤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써놓는다거나, 카카오톡 프로필의 사진과 상태 메시지를 바꾸고 SNS에 스토리로 올린다.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감추어놓은 내 감정을 읽어달라고. 그런데 그 시간들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마주하고 들어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이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관심과 존중을 바라기 이전에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존중을 해주는 건 어떨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인정하고 칭찬해줘야 한다.
MC와 인터뷰어로써 상대의 대답을 잘 끌어내는 질문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경청이다. 그리고 많은 화술 관련 책에도 쓰여있듯 말을 잘하기 위해선 먼저 잘 들어야 한다. 잘 들어야 물을 수 있고, 묻고 들어 봐야 말할 거리가 생긴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만큼은 쓸데없는 질문이란 없다고 생각하자.
정답이 정해진 시험만 보고 정해진 길만 걸으며 살았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이미 정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환경에 따라 세월에 따라 변한다. 그 사이 나도 미처 모르는 내가 생겨난다. 배움은 모르는 것을 향한 탐구라고 한다. 나를 궁금해하고 질문하며 나를 배우고 찾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