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장애물 있다
트라우마라고 불리기도 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준결승전. 이유빈 선수는 김예진, 심석희, 최민정 선수와 함께 출전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레이스 초반, 이유빈 선수가 바통 터치를 앞두고 넘어졌다. 1/100초로 순위가 뒤바뀌는 쇼트트랙에서 넘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결승 진출과 우승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은 최민정 선수의 빠른 터치와 함께 빠르게 재정비하여 올림픽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도 엄청난 기량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팀의 관점에서 보면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유빈 선수 개인적으로 보면 어떨까. 그녀는 4년 후 한 방송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 첫 출전이었는데 넘어진 거예요. 팀에 폐를 끼친 것만 같아 트라우마로 남았어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유빈 선수는 올림픽 경기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넘어지지 말고 언니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본인이 넘어지면서 도움은커녕 어려운 경기를 하게 만든 것 같아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트라우마는 사람의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으로 발생하는데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생긴 정신 장애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무의식에 자리를 잡아 특정 상황에서 두려움을 갖게 하거나, 특이하게 흔적을 남기며 표현된다고 한다. 마치 영화 [기생충] 속 다송이가 그린 그림처럼.
A 씨는 사십 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주도적으로 맡아야 하는 직급이 되자 발표를 잘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기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어서 한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말하는 거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니, 싫어해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랐지만, 나 또한 그랬기에 A 씨의 사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지는 질문에 불현듯 생각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A 씨는 초등학생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인해 잦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사를 갈 때마다 전학을 가게 되어 한 학기를 채 다니지 못한 적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잦은 이사와 전학은 A 씨의 교우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내성적이었던 어린 A 군은 또래와 어울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는데, 친구가 생겨도 전학을 가게 되면서 멀어지다 보니 차츰 친구를 사귀지 않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만난 친구들도 언젠가는 또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온 A 씨는 현재, 자신의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에는 동료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B 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B 군을 처음 만난 건 19살의 수능을 앞둔 고3 때였다. B 군은 유난히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A 씨와 마찬가지로 B 군에게도 여러 질문을 하며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B 군은 어렸을 때 말도 많고 장난기도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B 군이 집에서 말을 할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조용히 하라며 혼을 내고, 학교에서는 떠들지 말라며 선생님에게 자주 혼이 났다고 한다. 어린 B 군은 집과 학교에서 혼나는 일이 잦아지자 자신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점차 말이 없어지고 말을 할 때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졌다고 했다.
A 씨와 B 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두 사람의 어릴 적 기억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말을 하거나 스피치를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 안 좋았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을 수도 있고, 별 일 아닌 것처럼 훌훌 털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질문들에 확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트라우마라는 것이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수준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할 때 두려움부터 앞서는데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과거의 기억이 있다면 그 또한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자신을 막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당신 차례다.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를 트라우마라는 장애물을 찾아보자. 앞서 '왜 하고 싶은 거냐'라고 물은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그 목표는 언제부터 갖고 있던 것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전에도 노력했던 적이 있는가. 있었다면 그때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력을 했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거나 이루지 못했다면 혹시 내 안에 나도 인지하지 못한 장애물이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가. 장애물이 있는 것 같은가. 만약 있는 것 같다면 그 장애물이 언제 형성된 것인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시점을 떠올려보자.
급할 것 없다. 차근차근 곰곰이 생각해 보자. A 씨는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B 군은 말을 할 때마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혼났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대화를 하고 스피치를 하는 것에 장애물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가. 생각이 났는가. 만약 생각났다면 제대로 마주해 보기 위해 이 또한 기록해 두자. 혹시 아무리 생각해도 장애물이 될 만한 트라우마가 없는 것 같다면, 그건 정말 다행이다.
나는 A 씨와 B 군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지금도 그런가요?"
여전히 이사를 자주 다니고 이직이 잦아 친구를 사귀거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환경인지, 지금도 집이나 학교에서 말을 하면 부모님 또는 선생님에게 혼이 나는지 물었다. 두 사람은 뭐라고 말했을까. 모두 "아니요"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같은 답을 했다고 해서 당신도 같은 답을 할 것이라 말하는 건 아니다. 각자 처한 상황과 느끼는 강도는 다르기 마련이니. 다만, 나의 현재가 과거의 상황과 100% 완벽하게 똑같은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형성된 가장 최초의 시점과 같은 상황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과거의 기억에 걸려 주춤하고 있었던 것인지. 흑역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마주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마주하고 트라우마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지한다면, 당신은 현재의 상황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함께 힘을 내보자.
자, 그럼 당신에게도 물어보겠다.
"혹시 지금도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