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적게는 한 번 혹은 여러 번의 실패를 마주할 것이다.(어쩌면 단 한 번도 없을지도)
이번만큼은 '실패'라는 녀석이 제발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렇게 나도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실패 연대기다.
아래 링크는 이 내용을 토대로 올린 콘텐츠이다.
https://youtu.be/RmeHxOrs-6Y
일,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2002년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군,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체대 입시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공부를 잘했든 안 했든 고3이었던 난 수능을 마주해야 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터라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대학을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고 '학부모의 바람'과도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시 같이 운동을 하던 동네형이 체대를 입학했기에 나도 그냥 그 형을 따라 체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계획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대망의 11월, 내신 성적을 중간 정도 유지(?)해서 그런가 수능 성적도 딱 중간 정도 받았다. 이 성적을 토대로 가나다군 세 곳의 대학을 목표로 잡았다. 성적은 안정권이니 실기시험만 잘 보면 무난하게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인생 최저치의 몸무게를 기록하며 선수촌을 방불케 할 만큼 매일매일 운동에 매진했다. 12월 중순 첫 번째 대학의 실기 시험을 보러 가는 날.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크진 않았지만, 세 곳 중 그나마 우선순위로 꼽은 대학이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해 실기 시험에 임했다. 하지만 다른 지원자들과의 실력차는 너무나도 확연했다. 단 한 종목만 제외하고는 어느 종목에서도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그렇게 첫 번째 대학 실기시험은 아주 깔끔하게 끝이 났다. 아직 두 개의 대학이 남았으니 좌절하기엔 일렀다.
얼마 뒤, 두 번째 대학의 실기 시험을 보기 위해 천안으로 향했다. 놀러 가는 기분도 들면서 긴장 반 설렘 반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지원자들의 열기는 첫 번째 시험 그 이상으로 뜨거웠다. 마치 더 이상은 밀려 내려갈 순 없다는 병사들의 처절함 같아 보였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는... 나의 처절함이 부족한 것인가. 실력의 차이인가. 이번에도 같은 결과였다. 그럼 세 번째는 달랐을까. 아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난 안정권의 수능 성적을 받았지만, 저조한 실기 성적으로 세 곳의 대학교 시험에서 떨어졌다.
19년 인생 중 시험에 떨어진 경험이 처음이라 슬프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대학에 갈 마음이 크지도 않았던 나였으니 대학 진학을 포기할 확실한 핑계가 생긴 것이다. 그 후로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쉬고 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사촌 누나가 다니는 전문대에도 체육학과가 있으니 그곳으로 입학하는 게 어떻냐고 하시는 것이다. 4년제 대학에 모두 떨어지고 내심 편했는데, 갑자기 전문대라니. 대체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아신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런저런 변명을 해봤지만, 부모님은 "재수하면 재수 없다더라"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치시며 나를 설득해 나가셨다. (아마 부모님은 내가 재수를 해도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아셨던 것 같다.)
아들로서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었는지 "대학 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했으나,
나도 쉽게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며칠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며칠 뒤, 아버지는 나에게 회심의 한마디를 날렸고 그 말은 내 고집을 한방에 꺾음과 동시에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아들아, 어디를 들어가느냐 보다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하단다."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알려주신 이 한마디는 훗날 공부에 흥미가 없던 날 바꾸어놓았고, 비록 전문대이긴 했지만 매 학기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었다.
이, 하고 싶은 걸 못 했다지만
10년 뒤, 이십 대의 끝자락.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스물여덟의 난 또래들에 비해 많은 소득을 벌고 있었는데,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던 터라 고민이 많았다. 1년 뒤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도전하겠다 마음먹었고, 나는 스물아홉에 도전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지긋지긋한 일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퇴사를 결정했다. 모든 도전의 시작이 그렇듯 금방 잘 될 것만 같은 희망이 있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향해 도전한다는 생각에 즐겁고 설레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즐거운 만큼 시간도 빨리 간다고 했던가.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의 3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덕분에 스물아홉을 시작하는 겨울은 따뜻했다.
이내 따뜻한 봄이 찾아왔지만, 나의 봄은 아직이었다. 여의치 않은 집안 사정으로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방송국이 이렇게나 많은지 새삼 놀라며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이력서를 작성했다.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충만한 희망 덕분에 괜찮았다.
나의 목표를 주변에 말할수록 그 목표를 이룰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에 쑥스러움을 뒤로하고 몇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공채 아나운서들의 후기를 찾아보며 아나운서가 되어 TV에 나온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며 조용히 하라는 동생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또렷한 발음과 멋진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나의 스물아홉은 희망 회로 안에서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20, 30, 50, 80...
지원한 방송국의 숫자는 늘어만 가는데, 나를 찾는 곳은 여전히 단 한 곳도 없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희미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카데미 동기들은 진작에 그만뒀고, 학창 시절 친구들은 집안 사정으로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졌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속시원히 털어놓고 푸념이라도 하고 싶은데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책임감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출처 모를 책임감에 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이 보였던 걸까. 숨긴다고 숨긴 표정 사이로 일그러진 나의 모습이 삐져나왔던 걸까. 어느 날인가 동생이 무심한 척 한마디를 툭 건네는 것이 아닌가.
"잘 안된다고 쉽게 포기 안 하고 그래도 하고 싶은 거 꾸준히 하는 오빠가 멋진 것 같아. 난 그러질 못했는데"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며 큰소리치던 동생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서였을까. 외로운 싸움인 줄 알았는데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가 됐던 걸까. 그날 밤 난, 책상에 엎드려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삼, 생애 처음으로 다쳤다지만
또 10년 뒤, 어느덧 삼십 대의 끝자락.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이의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넘어갈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3에서 4로 넘어가는 시점이 다가올수록 알 수 없이 불안했다. 프리랜서 MC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스피치 강사로서 수강생들을 만날 때도 이런 불안함은 느낀 적 없었는데, 막연한 불안함에 조바심이 났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2019년 10월, 스피치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사내강사를 준비했다. 동시에 알고 지내던 PD와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옆 나라에서 '그' 사건이 터졌다. 처음엔 쓸데없는 걱정이라 생각했고, 금방 지나갈 줄 알았다.
해가 바뀌며 코로나는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공포에 휩싸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기회를 잡았겠지만, 나는 기회를 볼 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사업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잡혀있던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됐다. 사내강사 구직 활동도 잘 될 리 없었다. 한 방, 두 방, 세 방. 무방비로 직격탄을 맞았다. 누구는 전화상담원으로 누구는 배달에 뛰어들었다. 나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10년 전 그 일을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다시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청원경찰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빠른 시일 내에 커리어를 이어가겠다 생각했다. 2020년 말, 코로나가 장기화로 접어들며 비대면 행사가 늘기 시작했다. 새롭게 준비할 기회가 보이는 것 같았다. 2021년 중반을 넘기기 전에 시도하리라 다짐하며 구상하고 또 구상했다. 어느덧 5월, 프리랜서 MC 일도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다음 달을 D-Day로 잡았다. 그리고 기다리던 6월, 다리가 부러졌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껏 건강하다 자부했던 내가 깁스를 하고 목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내 한 몸 가누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고, 겪어본 적 없던 통증들이 매일같이 괴롭혔다. 혼자 살고 있던지라 부모님이 종종 오시곤 하셨는데, 여간 죄송스러운 게 아니었다. 때에 맞춰 장마가 찾아왔고 옴짝달싹할 수 없이 집 안에 갇혀있게 됐다. 최소 6개월에서 길면 1년, 혹은 그 이상 길어질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 말이 마치 시한부 선고 같았다. 누군가 이 말을 들으면 '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만 같아 자책감을 갖고 있던 나였기에 초조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이 이렇게 좁은지 그때 처음 알았다. 4평 남짓한 원룸에 누워 창밖으로 본 하늘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라 느껴져 우울했다. 이대로 사람들에게서 잊힐 것만 같아 불안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병들어 아파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고립되는 기분이 커지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선뜻 용기가 안 났다. 지금은 다행히 일상생활로 돌아왔지만, 그때의 난 엄마가 먼저 건네준 한마디가 없었으면 아마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들, 힘들면 언제든 말해도 돼. 괜찮아"
우리는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더 할 때도 있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에게 말하고 싶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그게 누구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애정 어린 한마디 아끼지 마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그 사람에겐 다시 살아갈 힘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