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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조 Jul 19. 2022

생존 본능이 발동하다

나를 각성시킨 군대

"저는 군대 안 갈 줄 알았어요"


얼마 전 대화를 나눈 2003년생에게서 들은 말이다. 내가 스무 살 때 태어난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이라니.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다. 나도 내가 스무 살이 될 때는 군대를 안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입영통지서가 날아왔고, 2년 동안의 군 복무는 나를 완전히 바꿔놓는 일생일대의 시간이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깨닫고, 커뮤니케이션을 배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말문이 트였다.


아래 링크는 이 내용을 토대로 올린 콘텐츠이다.
https://youtu.be/MFQMcyjx4Dc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피했다. 어렵거나 무섭다기보다 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고 여럿이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편했고 생각하기를 즐겼다. 생활 기록부 취미란에 '사색'이라고 쓸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이런 내가 군대라니. 단체생활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당시 체육학과의 분위기도 단체생활을 중시하긴 했지만, 내가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무리에 끼어있기만 하면 됐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2004년 8월의 무더운 어느 여름날.

긴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던 그때. 나는 그늘 하나 없는 운동장 가운데에 서있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102보충대대의 연병장이었다. 똑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무리들 사이에 서서 가족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군대를 가본 적이 없기에 군대를 가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2년 동안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가족들을 뒤로하고 나의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5주 간의 훈련소 생활을 거쳐 자대 배치를 받은 첫날. 내 인생의 변화를 불러올 시련은 이날 시작되었다. 내가 배치를 받은 중대는 4개 소대, 그러니까 5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가로로 길게 되어 있는 구조의 방을 같이 쓰는 곳이었다.(쉽게 표현하면 50명의 남자가 한 방에서 같이 잔다는 말이다.) 어느 한 조직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으레 그렇듯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정확한 질문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선임이 무슨 질문을 했고,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보였다. 아마 짓궂은 질문이었던 것 같다. 선임이 재차 물어왔지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은 나머지 나는 다시 한번 미소만 보였다. 선임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는 안 되었지만, 공기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선임은 앞으로 내가 지낼 그곳의 실세였다. 이윽고 그는 최고참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중대원을 소집하더니 이렇게 공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이 XX한테 말 걸지 마! 보이면 가만 안 두겠어!!"


그렇게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불편하지 않았다. 원래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한 마음도 들었다. 8월 동기가 세 명 더 있긴 했지만, 어차피 신병끼리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정말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선임 모르게 말을 거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대마저 빗나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혹시 '깨진 유리창 법칙'을 들어본 적 있는가.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되어 있으면 그 유리창을 더 깬다 해도 어느 누구도 상관하지 않아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내가 그 '깨진 유리창'이었다. 한 사람의 무시와 홀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져 다른 사람들에게도 번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며 괜히 욕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난 게 나 때문이라는 낭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의식주마저 불편해지다 보니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본능이 발동된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았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마당에 남은 군생활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고한다, 싸운다, 가까워진다. 여러 선택지가 떠올랐다. 선임들을 거치지 않고 간부에게 보고한다는 게 쉬울 것 같지 않았고 설령 보고한들 쉬이 바뀌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많은 인원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내가 고른 선택지는 '가까워진다'. 그 선임을 비롯해 모든 중대원들과 가까워지는 게 앞으로의 생활에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학창 시절에도 딱히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어떻게 하면 가까워질 수 있는지 당최 떠오르질 않았다.


무작정 관찰하기 시작했다.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성향인지 한 명 한 명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하고 정리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주. 막히고 삐뚤어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될 리 없었다. 내가 하겠다고 말하거나, 나도 돕겠다며 말을 걸어도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멈추면 내가 처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거절이 당연한 결과라는 걸 미리 알고 있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마치 연습이라 생각하고 시도했다. 또, 먼저 말을 걸다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또 몇 주가 흘렀다. 올 것이 왔다. 조심스러운 태도이긴 했지만, 말을 받아주거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는 인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먼저 찾는 경우도 생겼다.


시간이 지나 문제가 시작됐던 그 선임과의 오해도 잘 해결되었다. 다행히 해피엔딩이었다. 이등병 때의 이 경험은 남은 군생활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고,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발현되거나 각성한 것인지 아니면 없던 능력을 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이에게 군대가 좋은 곳으로 기억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군대는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자리 잡게 된 터닝 포인트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임무를 다 하며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국군장병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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