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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조 Jul 25. 2022

자발적 아싸와 대인 기피의 중간 어디쯤

목소리와 대인 기피의 상관관계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 십 대를 지칭하는 단어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를 자발적 아싸라고 표현해야 할지, 대인 기피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대화를 기피했다. 사촌 여동생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서였을까, 그래서 여자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더 편해서였을까.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시기의 남자아이들만 그득한 남중, 남고는 내게 감옥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군대에서도 말을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조교 시절,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갈 때면 우리 대학의 모든 남자 조교는 하나의 지역으로 편성되어 함께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 평소 학교 안에서는 업무로 만나다 보니 적당한 어색과 잘 갖춰진 매너로 서로를 대한다. 그러나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같은 군복을 입고 흙먼지가 주변을 감싸는 훈련장 안에서 만나면 학교에서 보여주던 적당한 어색과 매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오로지 군번과 나이와 복무한 군대로 서열이 정해지고 금세 형 동생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비단 예비군 훈련장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학교, 회사, 동호회, 심지어 커플(부부) 모임 등 남자가 셋 이상 모이는 집단이면 어디서든 벌어지는 것 같다. 


그럼 구성원 모두가 동갑인 학급에서는 어떨까. 외모, 성적, 신체능력, 운동화나 시계, 외투와 같은 의상 소품 브랜드 등 '나이'라는 손쉬운 방법이 없어도 서열이 정해지는 요소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암묵적인 서열이 정해지고 나면 드러내 놓고 군림하려거나 다른 학우를 은근슬쩍 자신의 아래에 두려는 세력들이 생긴다. 항상 이런 전개로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고 느낀 모습들은 그러했다. 그런 관계가 형성됨과 동시에 넘치는 테스토스테론으로 본능과 야만에 가까운 모습을 서슴없이 보이고 오히려 그게 멋있다는 도취에 빠져 자랑인 양 더 하기도 한다. 그건 단어 선택과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속어를 많이 써야 권력이 생기고 대화가 진행되는 상황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관계와 대화의 총량은 집에서 충족되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살 수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의미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소속되길 원하고 소속감을 느끼길 원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소속감과 소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가족과의 관계로 충족되고 있었기에 학교를 비롯해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대체 가족들이랑 어땠길래 그렇게 느낀 거예요?" 


누군가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많이 했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은 저녁이면 그날의 정산을 하시며 하루 동안 본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나누곤 하셨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도 어느 순간 대화에 자연스럽게 합류해 우리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거의 매일 밤이 이러했다. 아버지가 대화를 이끄셨는데, 우리 집에선 당연한 모습이었기에 어렸을 땐 모든 가족이 그런 줄 알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가족 식사를 했다. 내가 자취를 시작한 이후론 가족 식사가 월간 행사(?)처럼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어릴 적 그랬듯 많은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 아버지에게 어릴 적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가족끼리 대화를 자주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여쭈었다. 


"가족들 간의 우애, 화합, 소통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지." 

"우리가 어렸음에도 가족 간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랬던 거예요?"

"아빠는 너희가 본인 생각과 의사 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걸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배우게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학원보다 가족 간의 소통, 가정교육을 중시했던 거란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졌다.

"가정에서 아빠의 권위를 내세우기 이전에 자녀들의 자율을 중시하고 의사를 존중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아빠 말 들어."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땠는지, 상황과 그로 인해 발생한 감정에 대해 묻곤 하셨다. 그리고 자주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셨다. 여름이면 여름에 어울리는 노래를, 겨울이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불러주셨다. 가요와 팝을 오가고 시대를 넘나드는 노래들을 들려주며 감수성을 채워 주셨는데,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통기타의 담백하고 순수한 선율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아버지는 본인의 의도처럼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고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느끼고 배울 수 있게끔 분위기를 조성해주셨던 것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들려달라고는 잘 안 하지만, 어린 시절 편안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는 안정감의 매력들은 그렇게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았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감옥 같다고 느꼈던 건 자아의식이 형성될 그 시점에 마주한 또래들과의 대화 방식이나 어쩌면 짐승에 가까울지 모를(?) 남자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소 강압적일 수밖에 없는 선생님들의 대화 방식이 적응이 안 되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끼어들지 모르는 주변 목소리들이 소음처럼 여겨지고 낯설고 거센 단어들이 나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리는 순간들이 괴로워 귀를 닫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속한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겪은 대화 방식과는 상반된, 어쩔 수 없이 놓인 또 다른 사회 집단의 분위기에 적응이 힘들어 선택한 방법이 기피와 자발적 아싸의 길이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대인 기피'와는 조금 다른 결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도 내가 겪은 일들이 '대인 기피'라는 용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아싸'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후론 그 시절의 나는 '대인 기피'보다는 '아싸'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과 가까워지려 하지 않고 대화를 피했다는 면에선 비슷하다고 본다. 그래서 스스로 타협시킨 것이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어준 나의 과거가 고맙고 뿌듯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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