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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조 Dec 31. 2022

시간 속에 남긴 것들

Adieu 2022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아요. 남아있어요.
무엇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습이든 발현될 거예요. 삶에서 애써온 시간이 당장 결과를 만들 수도 있고 노력이 깊이 축적되어 뒤늦게 터져 나올 수도 있어요.

설사 끝끝내 터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삶을 돌아봤을 때 충만했고 행복했고 건강한 삶이었다면, 그리고 그 여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그대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또한 시간의 발현일 테니까요.




얼마 전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MBC 오승훈 아나운서가 자사인 MBC 유튜브 채널과 자신의 SNS에 남긴 말이다. 카이스트 항공우주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해군장교를 거쳐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며 '아나운서'에 이어 '변호사'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된 말 그대로 문이과 대통합을 이룬 이력.


그는 2011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아나운서 공개채용 신입사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5509: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3인에 들어 당당히 MBC 아나운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합격에 박수를 보낸 5509명 중 1명은 나다. 그에게도 그랬듯 내게도 동일하게 흐른 시간, 2022년.


나에게 흐르던 그 시간 위에 혹은 그 시간 속에, 나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1월

> 재활이 목표였다. 작년 여름 뜻밖의 사고로 오른발을 다치며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기 위해 재활 운동에 매진했다.

>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했다. 평소 궁금했던 목소리와 관련된 상식을 해소하고 보기 쉽게 요약한 콘텐츠였다. 조회수를 떠나 자기만족이 큰 콘텐츠였다.

> 서울을 벗어난 그를 보며 '꼭 서울일 필요는 없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2월

> 체중 감량을 시작했다. 깁스를 하는 동안 불어난 체중에 몸이 무거웠다. 개인적으로 헬스장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활을 겸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 03학번과 03년생을 만나게 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한 해에 태어난 아기들이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를 2003년생과 만나게 하고 콘텐츠로 만들었다. '03년생 친구는 우리를 화석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 경신한 기간이 새삼 놀라웠다.


#3월

> 수개월 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익숙했던 것도 잠시 손을 놓고 있으면 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인터뷰 콘텐츠를 시작했다. 목소리로 돈을 버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과의 교류는 없었기에 궁금해서 시작했다. 사실 불안했다.


#4월

>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5분 이상의 조깅은 무리였다. 그래도 다시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 10년 전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동생을 만나 인터뷰했다. 동일하게 흘러간 10년, 하지만 다른 흔적을 남겨온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봤다.

> 그의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걸까?'


#5월

> 목소리 만으로 월 천을 버는 이십 대를 만났다. 놀라웠다. '진짜 이 세대는 돈 버는 능력이 탁월한 건가?'

> 그와의 영화가 꺼졌다. 영사기 필름이 툭 끊긴 것처럼.

> 나의 시간 속 흔적들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흩어진 조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6월

> 친구가 연락해 왔다. 목소리를 다듬고 싶다고. 코칭 오랜만이다.

> 브런치 작가 등록. 나의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그것'에 한발 다가섰다.


#7월

> 목소리 코칭에 한 명 더 합류했다. 가벼운 조언으로 시작했던 게 수업이 되었다. 원치 않는 부담이다.

>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뒤숭숭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 혼술이 잦아졌다. 글을 쓰며 정리하고 혼술로 흐트러뜨리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8월

> 카페를 창업한 동생을 만났다. 창업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해 봤다.

> 일을 통해서지만, 전혀 다른 업계(VC)를 처음 알게 되었다. 세상은 역시 넓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 오랜만에 연락온 지인을 만났다. 우울증이란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 가족 나들이. 네 가족이 함께 나온 게 얼마만인가.

>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9월

> 친구와 여름휴가를 갔다. 잠자고 있던 흥이 폭발했다. 친구는 놀랐다. 아주 많이.

> 길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건넸다. 길거리 인터뷰. 그래, 나는 이런 걸 좋아했다.

> [한 달 살기]를 신청했다. 처음 해보는 도전이었다. '제발 되기를'


#10월

> 출판 공모전에 도전했다. 결과보다는 도전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적이 없기에.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다.

> 황금보이스란다. 문학동네 낭독 챌린지에 당첨되었다. '내 목소리 아직 죽지 않았구나'

> 거제도로 떠났다. [한 달 살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11월

> 희로애락.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희로애락이었다.

> 새로운 만남. 빠른 전개.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속에, 나의 모습 변해가고 있어 있어. 이렇게 빠른 전개의 드라마는 처음 본다.

> 같은 양의 시간을 살았지만 다른 환경에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움직여온 '동갑'별들을 만났다. 신기하다.

> 10년 전 함께 도전했던 동기들을 만났다. 각각의 시간의 흔적들에 대해 들었다. 나의 흔적들이 썩 괜찮았음을 느꼈다.


#12월

> 눈으로만 보고 읽었던 세계를 생애 처음 접했다. '이렇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정말 있었구나'라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 나의 글이 뽑히지 않았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더 다듬을 기회가 주어졌다.

> 아무 곳에서도 나를 찾지 않았다. 괜찮다. 내가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몰랐다. 글로 적으며 정리하기 전에는. 나에게도 시간의 흔적들은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었느냐'라는 질문의 답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여러 종류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고, 새로이 건강해지고 있고, 이러한 경험과 추억들로 나의 삶이 충만했으니. 그리고 이 여정을 나의 시간들 속에 남기고 기록하고 나눌 수 있으니. 이 또한 시간의 발현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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