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조 Dec 22. 2022

세 살 감정도 여든 갈까?

나의 핵심감정에 대하여

무릇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단다


몇 년 전, '핵심감정 테스트'라는 것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행동과 사고, 정서를 지배하는 중심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테스트였고, 여러 항목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한 나의 핵심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명] :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사전적 정의 그대로만 본다면 이토록 애처로운 감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있지 않다. 단지 그 감정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할 뿐. 내가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거나 모른 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둔다면 '외로움'은 관계에 집착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을 긍정적으로 활용한다면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고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게끔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는 가족이 제일 소중했고, 지금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몇 달 전, '핵심감정 테스트'를 다시 해보았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옛 어른들의 말은 역시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외로움'이란 핵심감정이 여전히 상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움'이란 감정 또한 여전히 근소한 차이로 상위에 있었다. 두 핵심감정이 언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체 왜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무엇을 그리도 보고 싶어 애태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부터 장사를 하셨다. 쌀가게를 운영하셨고 슈퍼를 운영하셨다. 내가 성인이 되어 군대를 갈 때까지. 누군가는 이 말만 들으면 이렇게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느라 보살피지 못해서 외롭게 자랐나 보네'라고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모님은 장사를 하느라 바쁘셨음에도 매일같이 가족 간의 대화시간을 가지셨고, 나와 동생을 데리고 정말 많이 놀러 다니셨다. 아버지께서는 본인의 트럭 짐칸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비롯해 온갖 야영 장비를 싣고 다니셨는데, 아마 그 당시에 유튜브가 있었다면 아버지는 100만 캠핑 유튜버나 인플루언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과 대화도 많이 하고 잘 놀러 다녔는데, 나는 왜 외로워했을까. 성인이 되어 언젠가-핵심감정 테스트라는 것을 해보기 전- 이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당시 나의 대답은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에 만족한 나는 친구들과 깊이 사귀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달까. 그래서 지금의 나는 친구가 거의 없다. 대학을 비롯한 학창 시절 친구들 중 가끔이라도 만나는 친구는 아예 없다.


어쩌면 나의 '외로움'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화와 유대 관계의 총량이 가족 사이에서 충족되고 있어 또래 아이들과 친밀히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사색이란 취미를 갖게 되었고, 사색은 주로 혼자 했기에 고독을 즐겼다.(이 무렵의 나는 고독함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고독을 즐긴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십 대와 삼십 대를 거치며 동네, 학교 등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하나하나 멀어지다 독립을 하게 되고 가족과도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 아마 그때쯤부터인 것 같다.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든 때 말이다. 내가 선택한 곳이지만 낯선 이곳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그 시기쯤. 나는 왠지 모르게 이 동네의 이 서울의 이 세상의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외로움'이란 감정은 '고독'을 거쳐 '이방인'에 다다랐다.(진화했다고 표현해야 맞으려나)


그래도 군대에서의 각성 덕분에 그 사이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람에 관심을 갖게 되며, 새로운 만남들을 만들어 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친구'라는 단어에 너무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던 탓일까. 나에게 '진짜 친구'는 없다는 생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친구'라는 결핍에서 오는 외로움은 그대로였을까. 그 자리를 채운 건 '연인'과 '연애'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스무 무렵의 짧았던 첫 연애 후, 나는 '연애'와 '연인'에 몰입했다. 대화와 화목을 중요시하던 부모님 덕분에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군대에서의 각성 후 커뮤니케이션에 눈을 뜨면서 센스(혹은 눈치)와 화술을 키운 덕분에 '배려'가 밑바탕인 연애를 추구했다.


그리움만 쌓이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또 다른 핵심감정인 '그리움'이라는 존재였다. 몇 년 전 핵심감정 테스트를 해보기 전까지는 '그리움'이란 감정이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반면 '외로움'이란 감정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란 뜻을 가진 그리움은 지난 시간들 동안 연인을 향해 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 자주 만나려 하고 더 많은 것을 맞추려 했다.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수록 '배려'라는 이름 안에 숨어있던 '그리움'은 더 다듬어지고 더 견고해져서 연인에게 더욱 잘 맞추게 되었다. 당연히 연애 기간도 길어졌다.


그러나 더 다듬어지고 더 견고해진 만큼 이별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과 공허함도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공허함과 허무함에 한참을 허우적대다 현실로 돌아올 때면 내 안에 내가 없음을 알아차리며 또 한 번 공허함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립다.' 


그런데 이별의 아픔이 아물고 사그라들어도 이런 생각이 여전했다. '나 괜찮은데 이 그리움은 뭐지?' 무릇 그리움에는 대상이 있을 터.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도 대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그리움에는 뚜렷한 대상이 없다는 것을.


나의 그리움의 대상은 때론 연인이었다가 때론 미화된 지난날들이었고, 또 때론 겪어본 적 없어 낭만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과거였다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유토피아였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콘텐츠 촬영으로 만난 한 인터뷰이는 내 안에 피터팬이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한때 연인이었던 A도 내가 다분히 이상주의적이라고 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핵심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삶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신 부모님 덕분에 어쩌면 모두가 외롭지 않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름의 삶을 살며 마주한 현실에 가끔은 치를 떨기도 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에 암울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의 마음 한편에서는 막연해 보이는 일말의 이상주의적 상상이 자연스레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치 상쇄시키기 위해 자기 보호 본능이 발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탓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무력할 때도 적지 않았다. 무력함은 무기력을 동반했고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의 연속이었다. 마치 심연에 빠진 것처럼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의 여러 핵심감정 카테고리에서 '무기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무기력함에서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믿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행위와 생각을 거듭하는 시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


한 번의 인생, 비관적인 것보다 기왕이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게 낫지 않을까. 예전만큼 무조건적이고 열정적인 긍정은 아니겠다만, 다시금 낙천적으로 바라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상하더라도 이상을 품어야 그 이상을 해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헤비메탈(heavy met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