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서 다혜는 과외선생인 기우에게 자신의 동생인 다송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뭐?"
"다송이 쟤, 천재인 척 4차원인 척하는 거 전부 다 설정이에요. 설정. 예술가 코스프레."
다송이가 다소 독특한 행동을 하고 범상치 않은(?)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정말 천재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혜의 말처럼 설정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쩌면 평생 잊히질 않을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렸을 때 설정을 했다. '착한 아이'. 이것이 나의 설정이었다.
나는 4대가 함께 사는 집에서 자랐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가 나를 업어주었고, 유치원을 다닐 무렵엔 주말이면 증조할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근처 절을 다니곤 하셨다. 증조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기억되셨는데, 할머니는 무서운 시어머니로 기억하셨다. 후에 할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셨을 때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시어머니라며 소스라치게 놀라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촌 여동생들은 증조할머니께서 자신들을 쌀쌀맞게 대한다며 서러워하고는 했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는 여동생들과는 다르게 나를 유독 아끼셨다.
나의 아버지는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본인의 형보다 몇 년 후에 결혼했는데, 아들을 먼저 낳았다. 그러니까 증조할머니께서 처음으로 맞이한 증손자, 그게 나였다. 남아선호사상이 매우 짙다 못해 당연한 시대를 살아온 증조할머니셨으니 내가 오죽 예쁘셨을까.(이렇게 쓰고 보니 그때의 증조할머니가 조금은 더 이해될 것도 같다.) 그래서 나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고는 여러 말들을 많이 해주셨는데, 특히 이 말씀을 정말 많이 하셨다.
"네가 앞으로 이 집안을 이끌고 가야 한단다."
코 묻은 아이가 이 말을 알아들을 리 있겠냐만, 세뇌의 수준으로 듣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 년에 몇 번 있는 명절과 제사 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었다. 하원과 하교 후에 인사를 드리러 갈 때면 으레 나를 본인의 무릎에 앉히고는 말씀하셨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증조할머니께서는 내가 중학생 때 떠나가셨다. 하지만 증조할머니의 저 한마디는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쌀가게를 운영하셨다. 이후에는 슈퍼마켓을 운영하셨다. 두 분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하셨는데, 그러면서 나와 동생을 살뜰히 돌보셨다. 어머니는 손주며느리, 며느리, 사장님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다 해주셨고, 아버지는 본인의 부모님과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내가 행여 지치진 않을까 챙기며 '아빠'로서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일 밤 대화를 하고, 산으로 바다로 많이 데리고 다녔다.(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 서였을까. 증조할머니의 한마디가 나를 세뇌시켜서였을까. '착한 아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고, 동생을 챙기고, 말썽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애늙은이'라고 불렀다.
중학생 때 '힙합'이라는 만화책이 유행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책에서 본 동작들을 따라 하곤 했다. 동아리를 만들고 춤을 배우기 시작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춤을 좋아했던 나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춤을 배우러 가게 되면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무렵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부모님 일을 도와드렸다. 슈퍼마켓의 진열대에 물건을 채우고, 창고를 정리하고, 배달을 다녔다.-오토바이 면허를 따기 전까지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배달을 했다.- 훗날 집안을 이끌고 가려면 무엇보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한가롭게(?) 춤이나 추고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민망하고 부끄럽게 웃으며 넘길 재미난 추억이지만, 당시의 난 무척이나 진지하고 강박이 심했다.(이건 지금도 모르실 거다.) 고3 수험생에게 중요하다는 여름에도 공부나 2002 월드컵을 뒤로하고 배달을 다녔다니.
참, 나도 나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지만, 어찌저찌 전문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전문대인 데다 체육관 천장이 다 지어지지도 않은 생긴 지 2년밖에 안 된 신설학과였다. 맙소사, 학과의 세 번째 입학생이었던 내가 졸업 후 학과 조교가 되었다. 교수님들께서는 역사가 길지 않은 학과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다. 각종 스포츠대회에 출전하고, 전문 체육선수들을 후원하려 애쓰셨다. 그 덕분에(?) 실습 조교였던 나는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전국 각지를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3년 간의 조교 생활이 끝나고 이제는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3년이라는 조교 생활을 하며 애정이 쌓인 탓인지 후배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선배가 되고 싶었다.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스포츠 재활병원의 운동치료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전공을 살리는 좋은 선배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학력 부족이라는 현실과 처음 들었던 것과는 다른 대우에 실망감이 컸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조교 출신으로서 학과를 빛내야 하는데 어긋난 것만 같아 창피했다. 이후 대형 피트니스 센터의 영업직으로 들어갔지만, 오래지 않아 나오게 되었고 아나운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아나운서가 된다면 비록 전공을 살리진 못했지만 멋진 선배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바라던 자리에 앉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부탁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착한 아들'이 되어달라고, '멋진 선배'가 되어달라고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만들어 낸 책임감으로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그 족쇄들은 나를 더 옭아매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어릴 적 증조할머니의 말이 무의식에 새겨져 그렇게 해왔다고 하기엔 어느덧 나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내가 본다면 어른으로 보일 그런 모습. 그런데 정작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어릴 때 봤던 어른들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몸만 훌쩍 커버린 아이 같았다. '나 잘했죠?'라는 눈빛으로 칭찬을 바라는 아이와도 같아 보였다.
그때 알았다. 내가 채웠던 족쇄들 때문에 몸이 자랄 동안 마음은 그만큼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족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꼬맹이였던 내가 생각한 '착한 아이'에서 벗어나자고 마음먹었다. 책임감이라는 족쇄를 끊으면, 어쩌면, 그럼에도, 나는 새로운 모습의 '착한 어른'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책임감에 착한 '척'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언행과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한 '착함'을 가진 모습의 어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