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집도, 내가 가던 상점도, 모두 그가 지었네
오크파크에 온 후, 유치원생이던 아이는 나라와 언어가 급격히 바뀌자 문화적 충격이 컸나 보다. 여기선 학교를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구나~ 하며 매일 초등학교 놀이터에 데려가 몇 시간을 놀며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구경했다. 아이는 학교 놀이터 붙박이 생활 이주가 지나니 살살 마음을 열었다. 이 나라는 유치원부터 의무 교육인지라 너 학교 안 가면 엄마 아빠가 경찰서 가야 돼 라고 꼬드기기도 했다.
등교 첫날 학교 현관에서 딸아이는 막상 겁에 질려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눈물을 흘려댔다. 학교 행정 직원이 아이의 손목을 힘들게 떼어 데려갔다. 하교시간에 조마조마 데리러 갔더니 딸아이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함빡 짓고 있었다.
새로 온 친구를 누가 도와 줄래라고 하니 반 친구들이 다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고. 선생님께서 구글을 검색하신 듯 한 한국말 인사도 다 같이 해보는 시간이 있었고, 한국 문화 알기 수업도 잠깐 했다고 한다.
기대하지 못한 대단한 배려였다. 부모 자식 간에 혹은 부부간에 인종이 다른 것이 흔한, 다양성이 매우 존중되는 소도시여서 그랬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스타가 된 듯한 기분으로 아침의 딸아이 눈물은 어디 갔나 싶었다.
딸아이는 이틀인가 삼일째에 아주 신기하고도 귀여운 쪽지를 하나 들고 왔다. 한글을 그린 듯한 글자로 딸아이를 반기는 환영의 편지였다. 딸아이는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라서, 우리 반에 어떤 애가 엄마인지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이거 줬어라고 종이를 내밀었다.
와 한글을 보고 그리셨네... 참 마음이 따듯하고 친절하신 분이네 했다. 아이는 다음날 다음날에도 계속 새로운 종이를 가지고 왔다.
딸아이는 자꾸 녀석이 와서 플레이 데이트(PLAY DATE)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데이트?? 뭐지?? 했더니 아이들끼리 같이 노는 약속을 플레이 데이트라고 한단다.
아직 유치원생들인지라 플레이 데이트는 부모님이 수반되는 행사인데.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안 되는 시간에 가족이 수반되는 모임은 나도 좀 걱정이 됐다. 그래서 저 쪽지에 있는 번호로 문자를 먼저 보내야 되나 어떡하나 망설이던 며칠.
아침 등굣길에 나를 보고 눈인사하며 다가오는 이 기특한 남자애 니콜라스와 미국인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남편이 한국인인데 1960년대에 학자로 미국에 이민 오신 부모님 덕에 미국에서 태어나신 분. 보스턴에서 학교다니다 만났다는 부부는 한국어나 한글을 잘 모르셨다. 아들 니콜라스가 반에 한국에서 갓 온 여자애가 왔는데, 아직 영어가 안 통하니 한글로 편지를 쓰고 싶다고 미국인 엄마에게 간곡히 부탁했단다.
미국인 엄마께서 남편 쪽 친척 조카 중 연세어학당을 잠시 다녀본 다닌 조카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냈고, 받은 글자를 이렇게 손수 그려서 편지로 보내주신 거였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 참에 플레이 데이트 이야기를 했다. 아직 우리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집에 가구고 뭐가 다 없어요라고 했다. 미국인 엄마는 다 안다는 미소를 띠시며 자기네 집 놀러 오라고.
그렇게 가본 니콜라스의 집은 너무 멋졌다. 굵직한 오크와 스테인드 글라스의 향연.
우리 부부가 건축과 도시를 가르치고 책으로 쓴다고 하니 집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 동네 평균인 100년이 넘은 목조 저택을 본인들의 집으로 구하고, 전문 복원 건축가에게 맡겨 일 년을 넘게 공을 들여 복원했단다.(이게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 이게 이동네 사는 분들의 보편적 특성이랄까.. )
복원 건축가가 이 프로젝트로 히스토릭 프리절베이션 상도 받으신 걸 스크랩해 액자에 걸어 놓은 것도 보여주셨다. 다락의 난간은 수리하다 지하실에서 옛날에 떼어놓은 게 나와서 달았고, 여기 스테인드 글라스는 어떻고, 이 오크 바닥과 벽은 어떻고, 등등등.
그러면서 이 집은 E.E. 로버츠(Eben Ezra Roberts (1866–1943))가 설계한 거라고 자랑스레 말해 주었다. 음? 오크 파크에 갓 입성한 나로서는 아직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헤밍웨이밖에 모르는데. 누구? 하는 표정에 니콜라스 엄마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동시대의 건축가인데, 아마 둘은 서로 알았을 거라고. 이 동네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20년을 살다 떠났고, E.E. 로버츠는 자식까지도 여기서 같이 일하며 평생 이 동네에 건물을 엄청 지었다며. 몇백 개는 될 거라고. 아마 이 동네 눈에 보이는 웬만한 건물은 거의가 E.E. 로버츠가 지은 거라고.
그러고 보니, 내가 한국에서 오크파크의 집을 알아볼 때, 1순위였던 집이 있었다. 중세 스타일의 가고일 조각이 꼭대기에 붙어있는 백 년 넘은 벽돌 아파트.
일층 부분 임대 계약을 마악 하려 했을 때 누가 채 가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 집 앞에도 E.E. 로버츠의 작품이다 라는 오크파크 랜드마크 위원회의 표식이 있었다.
딸아이가 걸어서 다니던 태권도 도장(관장님과 사범님이 동남아 분들이셨다. 딸아이는 그 도장에서 한국어 구령을 진짜 한국 발음으로 제일 잘했다) 가는 길의 기다란 상가건물도 알고 보니 E.E. 로버츠의 작품. 오크 파크에서 내가 지나가고 이용하는 거의 모든 앤틱 한 상업 건물들이 그의 작품이었다.
차가 없던 우리 가족은, 오크 파크에 있는 성당의 미사를 산책하듯 걸어서 다녔다. 미국의 기독교나 천주교는 신도들이나 종교인들이 많이 고령화되어 있는 상태다. 오크파크의 성당도 마찬가지라서, 평균 연령이 팔십 대는 훨씬 넘으실 것 같은 은발의 등이 굽은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했다.
젊은 동양 가족이 새로 성당에 보이자, 미사 전례를 돕는 할아버지는 딸아이를 '마이 리틀 캔들 블로워'라고 부르며 미사 후 제단의 높은 초를 끄도록 해 주셨다. 케이크 초 끄는 것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제단의 높고 화려한 초를 번쩍이는 종으로 눌러 덮는 대단한 초 끄기 라니. 딸아이는 어깨가 으쓱해져 미사 후 매번 그 특별한 촛불 끄는 시간을 기다렸다.
성당의 일요일 메인 미사가 끝나면, 성당 한쪽에 딸린 홀에서는 성당 다니는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들어오신 각종 파이와 뭉근한 오븐요리로 같이 점심을 나눴다. 기부금 내는 저금통에 달러 몇 장 넣고, 우리 가족은 미국 할머니들의 진짜 집밥과 푸딩과 디저트와 커피를 매주 거기서 마음껏 먹었다.
그렇게 매주 먹다 보면 다른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동석을 하게 된다. 거의 다 오크파크 토박이 그분들끼리는 수십 년 아니 백 년 조금 안되게 다들 아시는 사이라서 대개 우리의 호구조사를 하신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왔고요 건축 도시 쪽을 연구해요라고 말씀드리니, 어느 날 마주 앉으신 한 할머니가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여보 이 가족 우리 집에 초대해야겠어요라고 옆의 귀가 잘 안들 리시는 할아버지에게 크게 이야기하며. 할머니 성함은 헬렌, 할아버지 성함은 조지라 하셨다.
할머니는 이 성당의 건축위원회에서 활동하시며, 건축 복원 쪽으로 논문과 저널을 발표하셨다는 분이셨다. 본인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으나, 컴퓨터 이메일은 쓸 줄 안다며 이메일을 가르쳐 주시며 본인 집에 초대하셨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이 로버츠의 이름을 그분 입에서 들었다. 우리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E.E. 로버츠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그의 시공업자가 지은 집이라고, 꼭 구경시켜 주고 싶다고.
네 부르셨으니, 집 구경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얼른 가야 합니다.
오크파크, 아니 시카고에서 파이 맛집 순위 몇 번째에 든다는 스필트 밀크(Spilt milk) 파이집에서 따스한 파이 한 판을 예약해 들고 갔다.
파이와 커피를 먹으며 할머니께서 수십 년도 전에 건축에 대해 쓴 글, 무려 타자기로 치고 복사한 누렇게 변한 인쇄물을 꺼내와 보여주셨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성당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한탄도 듣고.
할아버지께서는 대략 80대 이상이셨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치셨는 피아노로 멋진 손목 스냅을 보이며 노래와 연주를 해 주셨다.(흑백 영화 속 장면 같아 많이 신기했다...)
일층 통째가 거실과 주방인 너른 평면이었다. 백 년 넘게 사용된 목조건물의 단아하고 반질반질한 짙은 오크 빛 내부였다. 오크파크 시그니처인 개인 저택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 곳곳에 있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많이 썼는데, 오크파크의 20세기 초기에 지은 목조주택들에 대부분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걸 보면, 그냥 그 시기의 유행이었던 듯하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깨지고 훼손된 건 어떻게 하냐고 여쭤보니, 이런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복원해주고 그때 느낌으로 창문 유리를 만들어주는 장인이 아직 있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장인의 연락처를 찾아서 주려고까지 하셨다.
그러고는 우리 집은 시공자가 도면을 몰래 갖다 그대로 만든 집이지만, 우리 집의 옆 옆집이 E.E. 로버츠가 직접 설계한 집이라고 하셨다. 지금 주인이 바뀌면서 전체 공사를 하고 있으니 같이 보러 가자 하셨다.
휘척휘척 마른 몸에 보청기를 끼고 등이 굽으신 할아버지께서 지팡이를 집고 힘든 걸음을 걸어 그 집으로 가셨다. 그 작은 몸에서 매우 큰 목소리로 나는 옆 옆집 사는데 여기 한국에서 오신 양반이 건축을 한다고 해서 이 집 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현장 인부들에게 인사시켰다.
너무 마르시고 걸음도 잘 못 걷는 분께서 E.E. 로버츠라는 오크파크의 로컬 건축가를 자랑스레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었다랄까.
남편은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며 이야기했다.
내게 만일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아...라고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