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킴 Apr 11. 2022

네이선 무어 하우스, 힐스 디카로 하우스

핼러윈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집들에서 사탕 받기 3

네이선 무어 하우스(Nathan G. Moore House, 1차 1895년, 2차 1923년)


네이선 무어 하우스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집과 작은 길 사이 대각선으로 위치한 집이다. 

양 집의 이층 창문에서 밤에 서로 뭐 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다. 

그렇게 가까운지라, 건축주 네이선 무어가 길 대각선에 사는 이웃사촌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우선적으로 의뢰해 본 건 당연하다. 


당시 건축주는 잘 나가는 변호사였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스승으로부터 마악 독립한 신참내기 건축가였다. 이미 그의 스타일은 옆동네에 지은 윈슬로우 하우스에서 처럼 깊은 처마와 모던한 외관의 아메리칸 스타일 건축을 보여주었다. 

윈슬로우 하우스, 1893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독립 건축가로서의 첫 번째 작품


잘 나가는 변호사 건축주는 이 전 작품을 지칭하며 그딴 흉한 것 내게 디자인해 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매우 고전적인 튜더 양식의 중세스러운 집을 요청하며. 


건축주의 요구안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추구하는 디자인에는 심한 갭이 있었지만, 그는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당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한 말이 "애 세명이 제대로 된 신발도 없이 거리를 뛰어놀고 있어서..."

건축주의 취향으로 1895년 지어진 튜더 양식의 네이선 무어 하우스

그렇게 건축주의 강력한 요구로 1895년 지어진 집이 1922년 전기 누전으로 불이 나 2,3층이 소실되었다. 


이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오크 파크를 떠났고, 일본과 LA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큰돈을 벌어다 주는 프로젝트가 아닌 이 건을 안 맡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대리인으로 작업할 로컬 건축가를 선정해 1923년의 증개축을 진행했다. 그리고 신출내기 건축가 때 건축주의 요구에 눌려 못 했던 그의 스타일을 두 번째 증개축에서 보란 듯이 왕창 보여주었다. 

다량의 장식적 테라코타와 그때쯤 한참 몰두해 있던 마얀 스타일을 커다랗게 넣어. 


이미 미국 건축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라 건축주와의 관계가 역전된 상태였으니 가능했겠다. 

1923년의 디자인. 동글동글한 구슬 테라코타들이 마얀 스타일. 처마가 커지고 큰 수직선이 들어갔다. 


사실 이 네이선 무어 하우스는 매일 이 앞을 두 번씩 지나다녔지만 늘 궁금했다. 오크파크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작품들은 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집만 사람의 흔적이 미미해서다. 


이 큰 저택은 늘 불이 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실내 어디에 한두 개 켜 있는 불빛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데, 계단실 같은 곳에 방범용으로 켜 놓은 듯했다. 어두운 거실 유리 바깥으로 티브이 화면이 바뀌며 계속 흔들리는 잔상이 유리에 비쳐 나오기도 했다. 사람이 살긴 하는 것 같긴 한데... 


잔디는 늘 잘 관리되지만, 이 정도 사이즈의 집들은 집주인이 하는 게 아니라 잔디관리 업체에 맡기는지라. 

봄인가에 중앙 현관에 장애인 리프트 공사를 하길래, 이 집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분이 살고 계시는구나 했다. 


어느 날 오후에 학교에 아이 데리러 가다가, 이 집의 창문 나무 장식이 우지끈하고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길 건너편에서 목격했으니 망정이지 그 아래를 지나갔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굉음이 나도 이 집 안에선 아무도 나와보질 않더라.  



다른 집에 불이 환히 들어와도 이 집은 내부에 작은 등 몇 개만 켜 있고 인적이 늘 없음.
어느 날 산책하다 목격한 미국 역사문화재(NRHP)의 파손. 우지끈 소리가 나며 무너진 거대한 창문 장식. 
이렇게 큰 소리가 나도 아무도 안 나와보는 게 이상하긴 했음. 



이 집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궁금해 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오크파크의 핼러윈 날, 인근 블록의 꼬마들까지도 이 포레스트 애비뉴 길에 다 모여들어 사탕을 얻는다. 

유명한 대저택 길인지라, 사탕 초콜릿 인심이 매우 후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우리도 이 집에 도전. 


마당 중앙에는 두세 시간 전에 온 눈도 치워져 있었지만, 꼬마들이 목청껏 아무리 트릿 오아 트릭을 외쳐도 어른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역시 핼러윈 장식 조명이나 핼러윈 호박 하나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라는 생각을 했다. 


미국 처음 와서 멋도 모르고 핼러윈 날 사탕 준비 안 했다가 온 동네 꼬마들이 문을 두드리는 통에, 불을 다 끄고 사람 없는 척했다는 누군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렇게 네이선 무어 하우스는 핼러윈 저녁에 드넓은 마당 한번 들어가 본 걸로 만족했다


이 집 이층 오른쪽엔 불이 켜져 있다. 궁금해 먼저 다녀간 꼬마 손님들의 눈밭 발자국이 가득하다
눈길 치워진 길을 따라 포치까지 들어가 본 이날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이날의 문 두드림이 정말 많이 미안해졌다. 


이 집에는 로버트 듀갈이란 사람이 어릴 적부터 살고 있었다. 이 동네 고등학교 레슬링 팀이었고 퍼듀 대학을 나와 다시 동네로 돌아왔다. 오크 파크 커뮤니티 축제의 공동 의장을 맡으며 지역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척수 소뇌 변성증(Friedreich's ataxia)이라는 유전병이 내려왔다. 젊은 시절에 진행되어 온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는 2001년까지는 오크 파크의 건축 축제에 집을 오픈하였으나 이후 유전병이 진행되고 형제도 같은 병으로 죽으며 문을 닫아걸고 이 집에서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4월에 코로나와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우리가 이 집 문을 두드렸을 때, 이 사람은 이 집 안에 있었겠구나. 

가끔 보이던 티브이 화면 돌아가는 불빛 아래 특수 침대에 누워 이십 년의 세월을 헤아렸겠구나. 어릴 적 숨바꼭질 하기에 너무 좋았다는 거대한 저택에서 개구쟁이로 자라나 젊은 나이에 병석에 누워 버린 사람. 


마음은 집 문을 활짝 열어주고 싶었을 텐데. 이 사람이 맞은 핼러윈 축제는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고요한 정적 속의 집에서 이런 소음이라도 반가웠을까. 핼러윈 저녁에 멋 모르고 문을 두드린 것은 과연 잘한 행동이었을까.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한때 오크파크의 이웃사촌이었던 사람으로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ills–DeCaro House( 1906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리모델링)



오른쪽의 네이선 무어 하우스,  왼쪽의 힐스 디카로 하우스


이 두 집은 딸 집과 아버지 집이어서 한때 마당을 공유했다.  


그리고 네이선 무어 하우스를 소개하는 김에, 바로 옆 건축 작품도 소개. 


바로 옆 집은 힐스 디카로(Hills–DeCaro) 하우스 다. 

이 집은 네이선 무어 하우스를 의뢰한 변호사 주인장이 자기 딸(Mary)이 결혼할 때를 대비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이 집은 원래 1883년에 같은 길 약간 아래쪽에 지어졌는데, 변호사 주인장이 사서 1900년에 이 장소로 옮겼다. 이후 대지 병합에 5년을 썼고, 1906년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의뢰인 변호사 주인장의 11년 전 바로 옆 집보다는 자기 색을 드러내며 프래리 스타일로 리모델링하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딸의 결혼선물을 준비했지만, 완공 시까지 딸은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 

임대인이 두 번 바뀌고 나서야 딸이 이 집의 이름 첫 자에 붙은 사위 힐스(Edward Rowland Hills)와 이 집에 살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결혼 선물을 자신의 취향이 전혀 아니라며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원 디자인을 많이 개조하고 뜯어고치며 1965년까지 이 집에 거주했다. 


이후 소유주가 디카로(Tom and Irene DeCaro) 부부다. 이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오리지널 스타일을 복원했고, 이때 오크 파크 랜드마크가 되었던지라 이 집의 이름 뒷자리에 디카로 라는 이름이 들어갔다. 


이 집은 2001년부터 새로운 주인(Mark and Sallie Smylie)의 소유다. 

새 주인은 2009년 탈리에신에서 이 집 뒷마당에 대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옛 플랜이 발견되자, 그대로 이 집을 추가 복원하며 잘 가꾸고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지나다 보면 날씬하고 커다란 사냥개를 산책하러 나가는, 주인장과 개의 느낌이 많이 비슷한 부지런한 분들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장식. 집 전체가 선물상자 같다. 정원관리나 시즌별 집 꾸미기에 진심인 부지런한 현 주인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집의 북쪽에는 자그마한 하얀 건물이 하나 있다. 

정원관리 용품을 두는 작은 헛간 같기도 한 이것은 어린이의 놀이집이기도, 심지어 토끼집으로도 쓰였다. 


이 하얀 건물은 무려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의 티켓 부스다. 

화이트 시티라는 명제 하에 모든 건물을 다 하얗게 지었던 19세기 말의 만국박람회의 한 조각이다. 


이 집 측면 사진,  하얀 작은 구조물은 무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티켓 부스다. 




그렇게 19세기 인물들이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살고 있는 집들의 이야기는 오늘은 여기까지. 




참고

https://flwright.org/researchexplore/wrightbuildings/nathanmoorehouse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_G._Moore_House

https://www.chicagotribune.com/suburbs/oak-park/ct-oak-covid-dugal-tl-0423-20200416-hmwng652efbdbbt2wbocwe7yy4-story.html


이전 05화 아서 휴틀리 하우스, 초기 프래리 양식 대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